글 | 이재윤 (NGO인턴)
나선형의 계단을 내려와 은행 건물을 나서면 붕어빵을 파는 작은 포장마차와 곰돌이 조형이 있고, 햇볕이 쏟아지는 좌측으로 모퉁이를 돌면 완산경찰서의 높은 건물이 내다보입니다. (점심 무렵에는 항상 볕이 가득 쌓여있습니다) 눈을 찡그리며 걷던 회색 암석으로 깔린 길가엔 다소 투박한 이음새의 대나무 화단이 죽 이어져 있습니다. 우측엔 전라감영을 한창 복원 중이던 터가 있고 이 터는 가벽으로 가려져 있는데, 마마순두부라는 2층 식당에서 한 눈에 내다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작은 초밥집이 있었고, 입구엔 쇠 종이 매달려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청량한 종소리가 울렸고 지나는 행인의 마음이 함께 흔들렸습니다. 경직된 몸을 한 번에 녹여내는 오르골소리 같았습니다. 횡단보도를 건너 큰 감영 지도가 그려진 완산경찰서의 측벽을 지나면 조금씩 보이는 풍남문, 회백색 성벽과 진한 청기와, 전동성당의 짙은 아치 지붕. 원형의 상점들을 따라 돌던 길. 형형색색의 수건, 낡은 자전거, 달달한 씨앗호떡과 같은 사물들이 떠오릅니다. 제게 인턴을 얘기하라면 지금에선 사물들이 그 때 그 시간을 점유하고 있습니다. 아주 깊숙이, 고향을 떠나 전주로 올라와 학교 주변을 배회하던 때와는 다르게, 더 이상 이방인이 아닌 이 지역의 한 일원으로서 보낸 시간이었습니다.
위의 묘사는 점심을 때우기 위해 종종 남부시장으로 가던 길입니다. ‘참여자치연대’에서의 인턴 생활과 남부시장은 제 기억에 뗄 레야 뗄 수 없는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남부시장은 활동 기간 중 자주 오가기도 했지만 지역, 중소상인들의 터전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횡행한 감촉이 녹처럼 묻어있는 시장에 들어서면 계절의 한기만큼 온기 또한 들어차 있었습니다. 골목 곳곳에 자리한 식당들은 피순대 국밥, 새알 팥죽, 콩나물 국밥 등 나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가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운 날씨에 손님은 드물었는데도 주인들은 하나같이 난방기와 담요를 들고 밖으로 나와 가객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창엽 사무처장님께 저들이 왜 ‘바깥’에 있느냐고 물었고, 처장님은 호객 행위일 수도 있고, 예전 습성이 몸에 밴 것이 아닐까 하셨습니다. 아마 가게 안에 들어가 혼자 종일 있는 게 외로울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묘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명징한 장면 중 하나이고, 후엔 기어이 인턴 생활을 반추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짧은 기간 동안 몸담았던 참여자치연대는 다양한 의미로 ‘바깥’이었습니다. 충분히 안락하고 평안한 안에 머무를 수도 있는데 활동가분들은 가진 최소한의 것들을 갖고 바깥으로 나와 계신 것처럼 느꼈습니다. 박우성 국장님, 김숙 국장님, 김희진 국장님. 이창엽 처장님, 김남규 위원장님은 각자가 운영하는 사업과 활동 앞에, 말하자면 담요와 난로를 두르고 지나는 가객들에게 말을 걸고, 반기고, 설득하고 계셨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하지 못했고, 인턴으로서 처음 든 의문도 ‘왜 이분들은 ‘바깥’에 계실까’였습니다.
한 번은 울산으로 다 함께 참여자치지역운동연대 워크숍에 참여하러 갔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바깥’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자기를 착취하는 만큼 홀로 고립되어있는 현대인들이 지나는 곳곳에 그들은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가게 안은 내게(현대인들에게) 아주 안락한 공간으로 인식되고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가게 밖에서(보다 전문적으론 제 3섹터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누고, 바깥에서 고민을 나누고 수다를 떨며 추위를 잊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없어도, 조금씩 시대의 뒤켠으로 사라지거나 정체되거나, 불상사가 발생하거나 형편이 어려워도 서로가 뭉쳐 난관을 이겨내는 ‘주인’이었습니다. (시장에서는 같은 경우, 바깥에 있던 주인들은 전통시장의 수호자이기도 합니다) 주인들이 왜 바깥에 나와 있는가, 전통시장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시민사회는, 그 때의 광경과 기억 속의 사물들은 모두 어찌될 건가. 이러한 질문들은 제게 더욱 선명히 떠올랐습니다(다만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말했습니다. 제 3섹터를 지켜나가는 장본인이지만 주인은 따로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활동을 활동가분들과 함께 할 수 있었지만 인턴으로 했던 활동들을 구태여(짧은 지면에) 나열할 필요는 없다 싶었습니다. 대신 흥미로웠던 경험을 더 소개하자면 정기총회를 홍보하는 일로 회원 분들께 연락을 돌려야 했을 때입니다. 제겐 회원들께 전화하는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 번에 연락을 돌려야 하는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 때 김숙 국장님이 먼저 전화하셨고 저는 그 행동을 그저 그대로 따라했습니다. 그렇게 반복해서 전화를 걸다 보니 어색하게만 느껴졌던 일을 자연스럽게 정당화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가 ‘내’가 아닌 온전히 이 단체의 일원으로서 연락을 돌릴 수 있었습니다.(이 오묘한 인상이 중요했습니다) 제가 이 단체의 인턴이란 역할을 온전히 받아들였을 때는 안타깝지만 다 끝나가는 총회 직전이었고, 그 때 스스로를 잠깐 동안이지만 무명으로 여길 수 있었습니다. 잠깐 동안의 이름을 부여받아 이 자리에 있을 뿐이라고 느꼈습니다.
무명의 삶, 공간의 수호자이면서 주인은 아닌 삶, ‘바깥’을 지키면서도 만족하는 삶, 그럼으로 떳떳한 삶. 저는 언젠가 이러한 삶이 아주 매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5명의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의 활동가분들과 그 밖에 많은 분들. 그리고 이들을 지지하고 성원을 보내주시는 많은 시민 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이 글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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