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포커스/› 회원기고

[회원탐방] "세상을 정의롭게, 품성을 따뜻하게" / 윤찬영 대표 (2019.03월)

인터뷰·정리 | 김희진


인터뷰를 위해 대표님을 만나기 전, 특별한 근황이 있나 점검하느라 대표님의 페이스북을 다시 한 번 방문했다. 문득 이전에는 대표님이 스스로를 '사회노동자(social worker)'라고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 질문을 바꿔야 했다.





○ 사회노동자(social worker)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전주대학교가 제 직장이긴 합니다만, 제가 인정하는 나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사회복지사인데, 그 소셜 워커(social worker)를 사회복지사라고 하는 게 우리말로 정확히 번역된 단어가 아니거든요. 소셜 워크(social work)를 사회사업이라고 1950년대부터 받아들여서 사회사업가라고 불러오다가 그 말이 주는 억압의 선입견 때문에 1979년 말 사회복지학과라는 이름으로 서울대학교에서 이름을 바꿔요.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퍼져나갔고 그래서 지금은 사회복지학과, 사회복지사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소셜 워커라고 하면 일, 노동 이런 말이고 그래서 사회적인 일, 사회적인 노동이고 그걸 하는 사람은 사회노동자라는 말이 가장 적합한 단어라고 생각해요. 일반적으로 노동자라고 하면 내 노동력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로 임금을 받아서 생존의 근거를 삼는 임금 노동자를 말하는데, 사회적인 노동이라고 하면 임금을 바라고 일을 한다기 보다는 세상을 좀 더 공정하게, 정의롭게, 공동체 가치 지향에 맞춰서 일을 해가는, 공동체로부터 이탈하거나 배제되거나하는 사람들을 돌보거나 함께 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소셜 워크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이 소셜 워커죠. 그래서 저는 사회노동자라는 말을 선호해요.




○ 사회복지를 전공하시게 된 계기가 뭔가요?

; 사회복지를 처음부터 전공하고 싶어서 하게 된 것은 아니에요. 당시에 사회복지학과는 비인기 학과라고 말하기도 안쓰러울 정도로 존재감 없는 학과였어요. 사회복지학과가 인기 있는 학과가 된 것은 89년 이후일 거예요. 그전에는 알려지지도 않았죠.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사회계열, 공학계열 이렇게 계열별로 모집해서 2학년 때 학과를 정하는 방식이었거든요. 그런데 2학년 올라갈 때 성적이 안 좋아서 1지망에 떨어졌어요. 다행히 계열 전체에서 수석으로 탈락해서 고르기만 하면 됐는데, 2지망 2차 배정할 때 남은 과가 사회복지학과랑 지리학과, 인류학과, 신문방송학과였어요. 지금은 신방과나 미디어 학과가 인기가 있지만 당시는 전두환정권 때라 그런 쪽이 인기가 없었고, 개인적으로 인류학과에 흥미를 가졌지만 직업이나 진로를 연계해서 생각해보니 안 되겠다 싶어서 2차 배정 앞두고 몹시 헤맸어요. 그러다가 사회복지학과의 커리큘럼을 봤는데 개별지도, 집단지도, 지역사회 조직 이런 마음에 드는 과목들이 있더라고요. 우리가 원했던 혁명의 기반이 되는 그런 것들을 배우는 학문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어 사회복지학과를 선택했지요.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하긴 했는데 뭘 하는 과인지 몰라서 적응도 못하고 고향에서는 우리 집안, 우리 마을에서 서울대학교 나왔다고 기뻐하시는데 학과에 대해선 설명을 못하겠더라고요. 그때가 가장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입막음을 하느라 복수전공으로 법학을 신청했죠. 

법학을 하는 김에 고시에 붙자 하는 생각으로 공부를 시작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유신헌법으로 공부할 때라, 이걸 공부하려고 그 어려운 시험을 봐서 여길 들어왔나? 이걸 공부해서 인정받아 판검사 되고 변호사가 되나?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완전히 무시되는 유신헌법을 내가 공부해서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그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하나? 사법고시에 대한 환멸을 느낀 거죠. 근데 그렇다고 사회복지는 희망이 있나? 잘 모르겠더라고요. 외국에서 들어온 학문이라, 한국말 교제도 없고 2학년 때부터 원서로 공부했어요. 어렵지만 원서로 공부하는 게 가장 빨랐어요. 어렵게 어렵게 대학 과정을 마쳤는데 졸업을 앞두고 방황을 많이 했습니다. 무엇을 해야 될지 몰라서.


○ 전주에 오셔서 지낸 지 얼마나 되신 거죠?

; 제가 89년에 전주대학교에 부임했어요. 그때 가족들과 모두 함께 이사를 와서 전주는 내 고향은 아니지만 제 아들의 고향이 됐습니다. 어린 나이에 부모와 떨어져 외롭게 살았던 것이 나를 키우고 강하게는 만들었지만 인간적으론 너무 큰 형벌과 같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부모가 특별히 해주는 것 없이도 함께 있어주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전주대학교를 떠날 수 없게 만들었던 충격적인 질문이, 학교에 오자마자 학생들이 묻는 질문이 ‘언제 떠나실 거예요?’하는 거였어요. 우리 학교에 서울대 나온 사람 없는데 곧 다른 학교로 갈 거 아니냐고 묻는 거죠. 그때 사실 울컥 했습니다. 대개는 여기에 조금 있다가 논문 좀 쓰고 다른 학교 가시는 분들이 많이 있잖아요. 전주대학교를 높이 평가해주지 않을 거라는 학생들의 낙망, 낙심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절대 업신여김 당하거나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 아니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세상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평가하는 줄 알기 때문에 그런 대접을 우리 제자들이 받는 게 마치 내가 그런 대접을 받는 것 같아 학생들 많이 공부시켰습니다. 간판만 보고 무시했다가 ‘아, 정말 괜찮은 인재’라고 하도록 학생들을 훈련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은 거예요. 그래서 저한테 상처 받은 학생도 있었죠. 학생들 사이에서 학점 따기 힘든 기피대상 1호 교수로 찍혀있습니다. 


○ 학생들을 가르치실 때 강조하시는 게 있으시다면?

; 사회과학대학 평화관 건물에 가면 현판이 달려있습니다. 학장을 하면서 현판을 달았는데 “세상을 정의롭게 품성을 따듯하게” 저의 사회복지철학이자 사회과학적인 철학입니다. 정의는 정말 지켜야 되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것을 나도 지지하지만 그렇다고 정의만 가지고 세상을 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거죠. 인간에 대한 사랑, 세상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포기하고 정의만 주장해서는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봅니다. 또 우리 학교가 기독교 학교인데 기독교는 사랑이잖아요.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인데 너무 사랑을 내세우다 보면 그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부정과 부패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정의를 행하되 사랑을 잊어버리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되 정의를 놓치면 안 된다 이 두 가지를 통합하고 겸할 수 있는 그런 성숙한 사회복지사가 되어야 된다고 늘 강조합니다. 

사회복지도 너무 천사 같은 봉사만 생각하잖아요. 그것 때문에 사회복지사의 인권과 처우는 완전히 무너지고 있는데 그것을 바로잡는 게 나의 실천과제이고 또 시민사회 진영에서도 이걸 명심해야 된다고 봅니다. 


○ 축구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신 걸로 유명하신데, 지금 방송도 하고 계시죠?

; CBS <사람과 사람>을 5년 했어요. 그 프로의 <전주의 함성>이라는 코너에 우리 지역을 연고로 하는 스포츠 팀을 대놓고 응원하는 지역밀착형 프로그램으로 해보자고 해서 만든 것 같아요. 우리 지역의 전북 현대팀이 압도적으로 잘 하고 있으니까, 전라북도에 속한 것 중에 최고인 것이 무엇이 있을까 하니 축구밖에 없잖아요. 지역방송에 참여하는 것은 제 나름의 지역복지를 실천하는 활동의 하나였어요. 방송을 통한 대단한 변화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방송 할동을 통해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영향을 미치는 것이 내 나름의 운동이고 실천입니다. 특히 선거 때 후보자 토론회 하면서 방송에 나와서 거짓말이나 흑색선전을 하거나 좋지 않은 면 보이는 후보들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서 낙선이 된다든지 당선이 되도 결국 그것이 문제가 돼서 낙선하게 만드는, 정치인들 긴장하게 만드는 그러한 역할을 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도 유익한 경험이었고 나름 기여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축구를 좋아하게 된 건 어렸을 때부터였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는 학교 대표선수로 뽑혀서 대회에 나간 적도 있습니다. 대학에 가서도 조기축구회에 갔죠. 아주 흔하지 않은 대학생이었어요. 동네 쌀집 아저씨하고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내고 그분들도 서울대 학생이 축구팀에 들어왔다고 좋아해주시고 잘해주셔서 서울 살면서도 시골 사는 것처럼 잘 지냈어요. 그때 민추협에 나가시던 분이 계셨는데 전단지 문건을 몰래 스타킹에 숨겼다가 그분이 주시는 ‘민주전선’ 이랑 바꿔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그렇게 축구 인생이 시작됩니다. 나중에 축구에 관련한 책을 내보고 싶은 것도 있지만 우선은 축구 지도자 자격증을 따서 사회복지시설에서 봉사차원의 축구교실을 해보고 싶어요. 축구가 운동과 사회성을 향상 시키는데 가장 좋은 운동이잖아요.


○ 창립 20주년을 맞아 앞으로의 바람과 전망을 들려주신다면?

; 제가 전주에 살다보니 전라도에 대한 차별을 많이 느껴요. 전통이 강한 전주라는 것이 강점으로 작용하기 보다는 약점으로써 차별받는 게 억울했습니다. 서울을 가면 늘 지역을 강조하니까 저를 전주출신으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오랫동안 전주에서 활동하면서 이런저런 활동을 통해 김영기 대표, 김남규 위원장을 알게 됐고 함께 하자는 제안을 몇 번 받았는데 그때 서울 참여연대 활동이랑 민주화 교수협의회 활동 등이 겹쳐서 회원으로만 있었습니다. 이제 공동대표로 나서면서 드는 느낌은 지역의 시민운동이 기가 죽어 있는 것 같아 너무 안타깝다는 점입니다. 사실 지역의 정치인들이 지역의 의제를 이끌어가지 못하고 있어서 지역 전체가 가라앉고 있거든요. 저는 우리 단체가 정책이 강한 시민단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역에서도 전국적으로 주목을 받는 이슈나 의제가 발생하고 있잖아요. 이러한 것들이 정치와 행정으로 연결 되어서 실행이 되어야 되고 실제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되거든요. 그걸 위해서 시민운동을 하는 우리가 정책적 이슈나 의제에 대해 학습을 하면서 연구하고 성찰하는, 공부하는 시민단체가 필요하다는 거죠. 

어떤 이슈건 우리가 준비하고 있으면 우리 스스로가 해결해 갈수 있고 리드해 갈 수 있으니까, 그런 공부하는 시민단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