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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

 

이주희

 

버스는 길모퉁이를 돌아 얼굴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얼른 아른대는 번호판을 보려고 목을 길게 뺐다. ‘세 자리일까? 두 자리일까?’ 아빠가 퇴근길에 타고 오시는 버스는 99번이니 세 자리 100번 버스는 아무 소용이 없다. 보이는 번호판이 100번일 때면 .’하고 혼자 탄식하였다. 그것도 잠시, 다시 마음을 잡고 버스를 기다렸다. 그러다 나타난 버스 이마에 두 자리가 쓰여있다 싶으면 나는 버스가 오는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버스 안 사람들 속에서 아빠를 찾았다. 아무리 99번 버스라 하더라도 아빠가 안 타셨으면 쓸모없다. 그렇게 두 번째 단계까지 통과되면, 나를 지나쳐 멈춘 버스에서 아빠가 내리셨다. 그럼 나는 아빠!”하고 부르고 아빠는 환한 얼굴로 오야!”하셨다. 나는 퇴근하시는 아빠를 마중 나가는 일이 재미있었다. 멀리서 달려오는 버스 번호를 맞추고 사람들 속에서 미리 아빠를 찾아내는 일. 그리고 기다리고 있는 아빠와 만나는 그 순간의 반가움, 함께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다정한 시간. 내가 저녁이란 말을 떠올릴 적마다 피어오르는 따뜻한 것이 되었다.

 

엄마는 떨이로 나오는 것을 사기 위해 저물녘 시장에 가시곤 하였다. 그러면 나도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갔다. 장을 다 보고 나면 엄마의 두 손에는 무거운 장바구니가, 어린 내 손에도 묵직한 봉지가 들려 있었다. 시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가는 길, 우리는 한 번쯤 장바구니를 내려놓고 숨을 돌려야 했다. 엄마와 내가 그렇게 낑낑대고 가다 보면 퇴근하신 아빠를 반짝 만나곤 하였다. 아빠는 엄마가 들고 올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어주시려 나오신 것이다. 핸드폰도 없던 때였고 미리 시장 간단 말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빠는 우리가 시장 간 줄 용케 아셨다. 그리고 우리가 잘 다니는 길로 마중을 나오시곤 하셨다. 서로의 손에 나눠 든 봉지들이 나란히 부딪치며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이 어린 나의 기억에 쓰이고 또 쓰였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일이다. 퇴근길에 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잠자리채를 들고 가로수에서 뭔가를 잡고 계셨다.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는데 다시 보니, 우리 아빠다. 애도 아니고 사람들 많은 큰길에서 잠자리채로 뭔가를 잡고 계셔서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한쪽에 차를 세우고 아빠를 불렀다. 아빠는 다가오셔서 손에 든 매미를 보여주셨다. “정민이 녀석 유치원 다녀오면 매미 줄라고 잡고 있다.” 하시면서 허허허 웃으셨다. 유독 곤충을 좋아하는 손자 녀석에게 매미를 잡아주려고 분홍색 잠자리채를 들고 길가 나무들을 훑어보고 다니는 아빠의 다정함이란.

 

인간의 체온이 전할 수 있는 따뜻함이라는 게 있다. 사랑처럼 뜨겁지도 않고 식어 냉담해지지도 않는다. 벅차게 느끼는 큰 감정은 전혀 아니다. 이름 붙이기도 어려울 만큼 작고 작아 스며들거나 나도 모르게 다가와 몸과 마음의 구석까지 온기를 번지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여유를 만들며 부담스럽지 않게 다가온다. 슴슴함 속에서 혀를 사로잡을 만한 맛은 없어도 소박하게 맛있다고 느껴지는 음식 같은 것이다. 차가워지는 가을바람 속에서도 등 뒤로 쬐어오는 햇빛 같은 것이고 멋지게 타오르다 사라지는 불꽃이 아니라 떠올릴 적마다 다시 그만큼의 따뜻함으로 되살아나는 것이기도 하다.

 

14년 전 이맘때쯤 돌아가셔서 만날 수 없는 아빠. 다정함이란 무엇인지, 다정함의 온도는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해주셨다. 내 삶 곳곳에 숨어있다 살아나는 다정함. 굳어지는 마음에도, 찌그러진 자아에도,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는 순간에도 되살아나 나를 다독이고 일으킨다. 크지도 강하지도 않은 보잘것없는 감정이나 작은 숨을 가만가만 쉬며 오래도록 삶의 온도를 지켜준다.

 

바람이 제법 차가워진 가을, 작은 다정함을 꺼내어 내 가까이에 있는 오랜 사람들과 은근한 따뜻함으로. 쉽지 않은 삶을 사느라 터덕이는 서로의 마음으로 마중을 나가며. 고단한 삶의 짐을 나눠 들고 말없이 함께 걸어오는 저녁을 지나면. 다정함은 서로의 삶에 쌓이고 서서히 우리도 모르게 삶의 온도를 지켜갈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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