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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삶 이야기2.

배선수/회원

 

전교조 간사로 근무하던 시절의 내 상황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아버지는 오랜 지병이었던 간경화로 예수병원에 입원해 계셨고 어머니는 간호하느라 돈벌이를 할 수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큰아들이 당연히 가정경제를 책임져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속을 못 차리고(?) 있었다. 그래도 병원비라도 만들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전교조 간사로 근무하면서 선배의 추천으로 시내에서 극장을 운영하는 부자집 중학교 2학년 아들의 입주과외를 하게 되었다.

그 집에서는 본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입주과외를 원했지만 전교조 간사일로 불규칙하게 귀가하거나 때론 외박을 해야 하는 내 형편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어서 이를 부담스럽다고 사정 이야기를 하자 그 집에는 같이 하숙을 하면서 과외해 줄 것을 제안했다.

 

그래서 나는 다가공원 근처에 하숙집을 구해 둘이 하숙하면서 그 중학생을 관리하면서 공부시키는 반 입주과외를 하게 되었다. 물론 그 부모는 과외비 외에 둘의 하숙비까지 부담해야 했다. 그런 큰 부담까지 지고 시작한 입주과외가 성공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과외 선생의 역량이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본인이 공부를 원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경우에도 과외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게 내 다년간의 과외 경험상의 결론이다.

 

세월이 흘러 아내와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극장 매표에서 일하고 있는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다.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니 고등학교 다니다가 부모의 강권으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으나 그마저 성과를 내지 못하고 돌아와 아버지 사업을 돕고 있다고 했다. 영화관 매표소 일이 아버지 사업을 돕는 일인지는 의문이지만 말이다.

 

이 집에는 내 입주과외 제자(?) 외에 2살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하나 더 있었는데 내가 근무하는 근로복지공단 전주지사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만나게 되었다. 키도 크고 훤칠하고 멀쩡한 청년으로 자라서 왜 현역이 아닌 공익근무요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는지 물었더니 몸에 문신이 많아서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더는 묻지 않아도 그가 그동안 어찌 살아온 내력이 대충 짐작이 가면서 자식 위해 애쓰던 그 부모가 생각났다.

 

입주과외할 때 매달 과외비 지급일이 되면 그 어머니는 하루도 늦지 않고 흰색 각 그랜저 승용차를 폼나게 타고 나타나 괴외비와 하숙비가 든 봉투 두 개를 건네고 밥까지 사주면서 아들 공부를 부탁하곤 했다. 참으로 지극정성이었다.

아버지 또한 늘 영화표 등 선물을 아들을 통해 일개 과외교사인 나에게 챙겨 보내는 정성을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작은 아들 또한 그리 애쓰며 키웠을 터인데 자식 농사 마음대로 안 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생각이 났다.

 

하기사 나도 남말 할 형편은 아니다. 우리집은 가난해서 자식을 대학 보낼 형편이 못되었다. 그래서 그나마 학비가 저렴하고 졸업하면 바로 교사로 발령받을 수 있다는 국립대 사범대학에 나를 진학시켰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학비였다지 만 그마저도 등록금 납부할 때면 늘 다른 집에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근근히 공부시켜 이제 6개월이면 졸업해서 선생님이 되어 제 앞가림은 하겠지 하고 부모님은 기대했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민주화운동한답시고 수배자로 쫓겨 집 앞에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더니 얼마 못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 당시 어머니는 늘 울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전주교도소에 면회를 왔었는데 아버지는 아들에 대한 실망으로 마음의 문을 닫고 한 번도 면회를 오시지 않고 술만 드셨다. 아마도 아버지의 간경화는 나에 대한 원망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1심 재판에서 집행유예로 출소하게 되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출소하자 바로 군대로 끌려갔다. 전주 35사단에서 4주 훈련을 받고 최전방 강원도 화천에 있는 부대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우리 부모는 먹고 사느라 바쁘셨고 차도 없이 강원도 화천이라는 생소하고 멀기만 한 그곳에 면회갈 엄두도 못 내었다. 전화통화 마저도 맘대로 할 수 없었다. 내가 부대 배치를 받던 당시 873월에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하여 날마다 집회로 시끄러웠으니 연락도 못해 소식도 모르는 부모님 마음은 오죽했을까. 애간장이 다 녹아나도록 가슴앓이했을 우리 부모님 생각하면 어쩌면 그들이 나보다 나은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곧 추석인데 2년 전에 돌아가신 울 엄마가 눈물나게 보고 싶다.

 

91년에 간경화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 장례를 치루고 나니 내 삶은 더 막막했다. 당시 운동하던 사람들은 졸업하거나 학교에서 제적당하면 투신이라고 해서 주로 공장 등에 취업하여 노동운동을 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래서 내가 하는 전교조 활동도 개량주의로 여겨졌는데 이마저도 그만 두고 먹고 살기 위해 직장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무원 시험공부를 하게 된 사연을 다음 소식지에서 계속 이야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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