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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나의 늙음과 사회적 효(孝)

[퇴직 교사, 전업주부로 살기 5]

| 정우식 (회원)

 

 

지난 2월호에서는 전업주부 생활이 10개월을 넘기며 가지고 있던 살림 밑천이 바닥나기 시작함에 따라 한 끼 한 끼 먹을거리를 마련하는 것이 걱정인 초보 전업주부의 현실적 고뇌를 토로한 바 있다. 먹거리 업그레이드를 위한 조언을 당부하기도 했다. 오늘은 그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내 삶을 지배하고 있는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나누고자 한다. 같은 형편에 놓인 분들이 적지 않을 텐데 쉬 내놓기 어려운 문제여서 먼저 꺼내본다.

 

 

 

늙는다는 것

 

조금 일찍 퇴직을 결심하게 만든 이유 중에 치매 초기 단계이신 어머니의 외로움을 방치할 수 없어서...’도 그 하나로 거론한 바 있지만, 사실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아니라 아주 결정적인 이유였다. 맞벌이 부부로 일 나가 있는 긴긴 낮 시간 동안 어머니 혼자 집에 계시도록 할 수 없었다. 어머니 혼자서 해결하실 수 있는 게 점점 없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지금도 늙어가고 있으시다. 어머니가 그리 될 줄은 몰랐다. 어머니는 항상 최고였으니까. 시집오신 뒤로 내내 집안에서나 동네에서나 어른들로부터 조선에 없는 며느리소리를 들으며 최고의 찬사를 받아온 어머니셨다. “이렇게 총기(聰氣) 좋고 솜씨 좋은 분이 또 계실까?” 지금껏 그리 여김 받아 오셨다. 그런 어머니께서 바로 아파트 옆 미용실에 파마하러 다녀 오시면서도 이제 거의 길을 놓치신다. 집을 못 찾으신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오십을 넘기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늙는다는 것을 의식해왔던 것 같다. 늙는다는 것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늙는 것이 편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런 태도는 때론 낭만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 스스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상태의늙음이라는 무언의 전제 같은 것이 깔린 늙음이었던 것 같다. 이제 어머니를 뵈면서, 또 나 역시 갑자기 기억을 놓치는 일이 잦아들고 쉬운 단어조차 떠오르지 않는 횟수가 빈번해지면서 조금씩 늙는 것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나의 늙음을 준비해야 한다.

 

 

모시고 산다는 것

 

신혼 초 직장 때문에 타지에서 살아야 했던 2년여를 빼고는 지금껏 25년 정도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정확히 말하면, 내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어머니가 우리를 데리고 사셨고, 그 뒤로는 같이 살다가, 지금은 우리가 모시고 산다.

지금 내 삶에서 가장 힘겨운 일은 입에 담기 죄송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일이다. 사실 힘들다. 잘 모시는 편이 아닌데도 내 삶이 없다. 어머니도 그러셨으리라. 자식들 키우시느라, 남편 뒷바라지하느라, 어른들 봉양하느라 이제껏 한 번인들 당신 삶이 있었을까? 늘 이리 생각하지만 그래도 어쩔 도리 없이 지금 나는 힘들다.

대부분 오십 대에서 육십 대인 내 또래 세대에게 부모 돌봄의 부담이 집중되어 있다. 장남이거나 비혼 딸이면 어김없이 더 그렇다. 베이비부머 세대인 이들은 자식들을 앞 세대보다 훨씬 늦게까지 부양해야 하고 부모 돌봄 부담을 오래 짊어지게 되어 있다.

가까운 주변에도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이 적지 않다. 요양병원에 맡겨모시지만, 돌봄의 책임을 온전히 떠안고 있는 분들도 있다. 노인복지시설이나 요양기관이 확충되고 복지 서비스도 많이 늘어났지만, 내 어머니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보호/요양시설에 대한 거부감이 크신 분들을 모시고 사는 자식들에게는 주간보호센터 같은 시설조차 그림의 떡이다.

나의 늙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말도 이와 관련 있다. 우리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영위해갈 수 없을 때가 오고야 마는데, 노년을 머릿속에 낭만적으로만 설정해놓을 게 아니라 현실적으로 받아들일 생각을 해야 한다. 요양시설 같은 사회적 의존을 거부감이 아니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가짐 같은 것을 말한다. 내 삶이 다음 세대에게 부담으로 떠넘겨지는 일이 없도록.

 

 

 

국가가 효도하는 사회적 효도

 

예전에 김대중 대통령이 사회적 효를 언급한 뉴스를 본 적이 있어 그 화두가 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검색해보니, 유림지도자들과 청와대 오찬(1999. 3. 18.)에서 충효(忠孝) 사상을 재조명하며 밝힌 소견이었다.

“... 효를 수행하는 주체에 관해서도 자식만이 하는 효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도 효도를 해야 하지만 이제는 국가가 효도를 해야 합니다. 자식이 자신을 낳은 어버이를 공경하고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경우도 많고 생활이 어려운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국가가 경로사상을 이어받아 노인을 보호하고 존경하며 생활을 안정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효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1세기 미래를 위해서는 자식의 효도와 국가사회의 효도가 합쳐져서 노인들을 바르게 모시는 새로운 모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20년도 넘은 오래 전 말씀이지만 새삼 그 안목이 가슴에 닿는다.

이제 효도하면 사회적 효를 먼저 떠올려야 하지 않을까? 국가가 효도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 부담을 국민 개개인에게만 전가해서는 안 되는 형편에 와 있다. 공공에서 제공하는 요양/보호시설이나 서비스에서의 삶이 충분히 인간적이고 행복하도록 좀 더 수준을 높이고 확충하는 것이 관건이다.

 

 

 

효도의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유지 발전 방안

 

김대중 대통령의 효 안목을 찾다가 이미 40여 년 전에 옥중에서 설파한 탁견을 발견했다. 좀 길지만 생각게 하는 대목이 많아 이로써 맺는다.

 

효도는 보은(報恩)의 높은 윤리적 측면에서만이 아니라 늙은 약자에게 최고의 보호와 행복을 줄 수 있다는 사회적 측면에서도 아주 강조되어야 할 것입니다.

효도의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유지 발전을 위해서 다음 몇 가지의 개선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효도의 개념을 종래의 일방적 복종과 희생으로부터 부모·자식 간의 상호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인격적인 것으로 발전시킬 것, 둘째, 효도를 부모와 자식 간의 개인적 차원의 윤리 외에 사회적 효도의 측면을 강화시켜 국가가 가난한 자식에 대한 부모 부양비를 지급할 것과 사회적 운동으로서 자식 없는 부모들에 대한 안정적이고 항구적인 봉양제도를 합리적으로 개발할 것, 셋째, 부모 봉양에 대한 장자 전담의 봉건적 관습으로부터 모든 자식들이 부모 봉양을 위한 비용을 갹출하는 제도를 권장할 것, 넷째, 모범적이고 합리적인 부모 자식 관계, 특히 고부 관계의 개발과 권장, 다섯째, 동거하는 부모 자식 간의 사생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가옥구조, 기타 생활방식의 개발 권장 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김대중 옥중서신24(1982. 7. 27.)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