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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글] 잠시라도

글 | 이재윤 (회원)



  한창 여러 겹의 재난을 치르고 있다. 연초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대유행하기 시작했고 그 사이 몇 차례 홍수와 태풍이 지나갔다. 폭우와 범람으로 휩쓸려 죽거나 구조하다 죽었다는 소식이 일기예보처럼 들려왔다. 매일 같이 발표되는 코로나 19 수치에 익숙해진 탓이다. 뉴스 너머로 쏟아지는 숫자들의 무게를 무감하게 흘려보냈다. 시간이 흘렀어도 인터넷상에 비난과 욕설은 여전했다. ‘깜깜이’ 무증상 감염 비중이 늘어나고 있고, 감염보다 주변의 비난을 더 두려워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도 종종 들려오지만, 사람들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느끼기에 비난을 듣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속수무책으로 내면의 바다에 폐기물을 흘려보내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19 바이러스는 직접적인 피해를 본 당사자뿐 아니라 거의 모두에게 깊은 피로감을 남기고 있다. 태풍이나 호우로 인한 피해와 같은 자연 재난과 달리 국가기반체계의 마비 등 사회 환경의 변화를 일으켜 사회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경우를 사회적 재난이라 한다. 특히 바이러스 유행은 물질적, 정신적 타격을 줄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불신과 경멸을 불러오고, 죽음이나 불행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깊은 피로와 우울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람들은 진상을 규명하고 악을 색출해 처벌하려고 하거나 심지어 피해 당사자들을 비난한다. 이 경향은 특히 전염병의 경우 극심하다. 감염되는 순간 피해자는 곧바로 보균자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언론의 보도는 두 측면에서 이 경향을 부추긴다. 첫째, 자극적인 사건들. 수용 여건이 안 되어 집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사람이 확진자였다거나 시신이 넘쳐나 매장할 곳이 부족하다거나 생계가 막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등의 참혹한 뉴스를 내보내면 사람들의 공포와 불안이 가중된다. 둘째, 타겟을 설정하고 여론몰이를 부추기며 편향된 서사를 생산한다. 사람들은 ‘그들’과 ‘우리’를 분리하기 시작하고 시야의 폭은 더욱 좁아진다. 


  세계의 변화 혹은 상실이 눈앞에 다가와 통제 불능일수록 통제에 대한 집착이 커지고,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본능에 의존해 식별 가능한 적賊을 포착하려 한다. 그리고 적을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공격-혐오와 차별, 비난과 분노를 표출한다. 이는 손상된 정신의 균형추를 바로잡으려는 노력의 발로이기도 하다. 실제로 최근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의 사람들의 불편반응을 부정-분노-협상-우울-수용으로 이어지는 애도 단계로 설명하기도 했다(David Kessler).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이 모두 관성적으로 행해진다는 점이다. 휩쓸리듯 과민하게 반응하고, 마구 쏟아내면서도 무엇이 제대로 대처하는 길일지 알지 못한다. 우리의 사고思考는 블랙아웃(black-out) 속을 걸어가고, 사람들의 자동 기계와 같은 대처는 터널 끝의 빛을 바라보듯 그것이 유일한 대책이라는 믿음에 근거한다. 문제는 이러한 관성의 연쇄가 일으키는 역효과다. 


  쇼크로 인해 기울어진 만큼 오뚝이처럼 다시 회귀하려는 본성, 이를 탄력성(resilience)이라 부른다. 이는 말 그대로 혹독한 위기에도 살아남아 다시 일어서던 인류의 특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 생존이라는 가치가 사람들의 판단력을 독점하면 생기는 역효과를 말이다. 정상의 상태로 회복하려는 욕구가 강해질수록 사람들은 피해자를 비난하고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적으로 치부되는 이들에 대해 더욱 냉담해진다.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안위만을 보호하면서 그에 위해를 가한 사람은 지인이라도 배척하고, 사회 전반적으로 관용이 감소하며 각자의 이해관계에 더욱 몰두한다. 피해를 보고 희생된 자들은, 개인의 불찰이거나 그렇게밖에 될 수 없던 조건에 처한 것으로 인지한다. 재난의 과녁이 명시되고 이제 공동체엔 ‘우리’만이 남는다. 


  돌이켜보자. 우리가 서 있는 이 영토가 더없이 정당하고 오염되지 않으며 평안한 상태이기 위해, 적어도 우리가 안전의 영토 안에 거주하기 위해 안전이란 가치를 훼손하는 무리를 추방하거나 제거해야 했다. 우리는 여전히 생존자로서, 비-확진자로서, 재난의 외부자로서 코로나 19 상황을 재인식해가야 했다. 몇몇 죽음이라는 희생을 치르더라도 결국에 사건은 종결되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이웃을, 주변의 약자를, 때론 선한 사람들에게까지 상처 주는 걸 감수해야 했다. 적극적으로 혐오하고 경멸할 필요도 있었다. 죽음을 납작한 통계수치로 바라볼 필요도 있었다. 그렇게 희생을 망각하며 평안과 안전한 영토를 획득할 수 있다면, 결국에 상대적으로 적은 사망자 수를 ‘성과’로 전시하면서 훌륭한 방역 ‘성공’ 사례로 기술될 수만 있다면. 그러나 언제까지 팬데믹(pandemic)과 같은 재난을 타자화된 영토로 인지할 수 있을까. 언제까지 재난의 당사자로서 짓이겨지지 않고, 우리라도 살아남아 다행이라며 안식의 한숨을 내쉬는 쪽이 될 수 있을까. 


  “‘사건’ 내부에서 일어났지만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한 폭력이 ‘사건’의 외부 즉 우리 세계에 침입해 오지 못하게 하고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서사와 우리의 판타지를 그것에 투영한 것이다.”(p.95, 오카마리, <기억∙서사>)


  현실은 이와 동떨어져 있다. 모두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하지만 재난이 체감되는 정도는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하물며 자가 격리와 같은 정부의 방역 조치 역시 마찬가지다. 장사를 미루면 당장 먹고살 돈이 없는 자영업자, 격리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고시원 주거자, 공동생활 등으로 격리 공간이 없는 사람 등 구체적인 수용 현실들을 외면한 일방적인 권고는 자꾸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물며 희생된 자들, ‘말할 수 없는’ 자들의 이야기는 어디 있나. 감염취약지역으로 선정된 후 병동 전체가 격리되었던 청도 정신병동의 희생자와 확진자들은 이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죽고 다친 자들은 이 과정에서 어디로 갔을까. 죽은 자들의 오명과 명예 훼손은, 이들에게 제대로 된 장례조차 치러 주지 못한 남겨진 유족들의 슬픔은 어떻게 된 것일까. 감염되었다는 이유로, 타인에게 퍼트렸다는 이유로 온갖 악성 댓글과 모욕을 받아야 했던 이들의 상처는 어떻게 될까. 편향된 재난 서사에 누락된 이들이야말로 우리에겐 가릴 수 없는 흉터이다. 


  흉터를 지우지 못할지라도 덧나지 않게 할 수는 있다. 출발점은 모든 희생에 대한 겸허한 애도다. 애도하는 일은 사상자의 숫자를 줄이는 만큼이나 중요하다. 애도는 기억이 되어 후대에 남을 것이고 더 많은 사람의 생명과 존엄을 보호할 것이다. 지난 6월 14일 페루 리마 대성당에서 코로나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미사를 열었다. 의자를 가득 채운 거로도 모자라 기둥과 벽면까지 도배되어 있던 유족들로부터 건네받은 5000명에 육박하는 희생자 사진들 앞에서 대주교가 뿌연 제향을 뿌리던 장면은 내게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비슷한 사례가 해외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간호 인력과 물품, 병상을 서로 주고받으며 격려했던 광주-대구 지자체 간의 ‘달빛동맹’, 코로나 19에 의해 희생된 무연고자를 위한 장례를 함께 치러 준 동자동 사랑방마을주민협동회 등 곳곳에 상실을 함께 애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코로나 19 유행이 언제까지 지속할지 알 수 없지만 잠시라도, 서로 경계하고 비난하는 일을 멈추고 힘겹게 버티고 있을 서로에게 격려와 애도를 보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