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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회원기고

[회원의글] 퇴직교사, 전업주부로 살기 2 "집 안에서 내 안을 본다"

글 | 정우식 (회원)





  지난 8월 회원통신에서 올해 2월에 퇴직했음을 보고 드렸다. 이제 전업주부-전업 가사노동자가 적합한 표현이겠지만, 여기서는 익숙한 전업주부로 쓴다-로 딱 일곱 달을 보냈다. 인생 황혼기 어머니, 갱년기 아내, 사춘기 늦둥이 딸과 함께 살고 있고, 주 활동 무대는 주방임도 말씀 드린 바 있다.


  지난번에 살짝 운만 띄운 바 있던 ‘살림하다 보니 내가 잘 보인다. 내 성격이며, 삶의 태도며,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는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가려 한다.


  여기서 ‘나’는 ‘실존적 나’, ‘사회적 나’를 두루 포함한다. 때론 ‘나를 둘러싼 사회’로까지 확장되어 쓰이기도 하는 등 중구난방으로 오가는 개념일 수 있으니 이 점 이해하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맨 먼저 나를 둘러싼 환경 속의 나를 들여다보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반환경적으로 사는 나를 본다.


  먼저 생활양식부터 보면, 요즘 코로나19 탓에 거의 하루 내내 집 안에서 사는 나는 참 반환경적이다. 일회용 비닐에 싸여 살고 플라스틱과 스티로폼 통에 묻혀 산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될 지경이다. 다른 것을 다 젖혀놓고 먹는 것으로만 국한해도 너무 지나치다. 이런 것들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 하지만 한계가 뻔해 도무지 방법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안 먹고 살자면 모르되 현재로서는 어찌할 도리를 못 찾고 있다. 편리함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나를 본다. 혼자서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자연과 다음 세대에 대한 죄책감도 나날이 커져 간다.


  스웨덴 공학자 ‘스텐 구스타프 툴린(Sten Gustaf Thulin)’이 비닐봉지를 발명한 것은, 종이봉투가 잘 찢어지며 물에 취약하고 내구성이 약한 탓에 일회용으로 버려지면서 나무 소비가 늘어 산림이 파괴되므로 이를 막아보려는 선한 의도에서였다고 한다. 비닐봉투는 가볍고 질기고 물에 강해 여러 번 재사용이 가능한 혁신적인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사람들은 비닐봉지를 여러 번 재사용하지 않았다.


  편리함이라는 무기는 이렇게 무섭고 막강한 것이다. 비닐봉지는 편리했지만 재사용은 불편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올바른 불편함보다는 손쉬운 편리함 쪽을 택한다. 나도 그렇다. 이런 나를 돌아보면서 대책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귀결되리라는 생각이다.




규제와 운동


  하나는, 이미 생산된 뒤에는 편리함이라는 늪에 빠진 ‘소비하는 나’를 통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소비 이전의 단계, 곧 제조나 생산 과정에서부터 줄이는 규제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일상적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혼자서는 몹시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사회적 운동으로 번지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전자는 한마디로 규제인데 기업의 욕망을 제어하는 수단이겠고, 후자는 운동이며 개인의 욕망을 조절하는 방안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개인인 나의 실천과 직접적으로 맞물려 있는 후자에 집중해서 언급하려 한다. 그러나 생각을 이어가다 보면 이 둘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여러 이름을 붙일 수 있으나 ‘쓰레기0(제로)’, ‘포장0’ 소비가 운동으로 일어나야 한다. 편리하고 위생적인-서구적 위생관의 문제점은 따로 언급할 수 있으리라- 개별 포장 방식이 얼마나 환경에 폭력적인지를 인식하고 이를 줄이는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학교에 있을 때 급식을 하면서 내용물은 50ml, 80ml밖에 들어있지 않은 아주 작은 음료 하나도 플라스틱과 비닐 용기에 개별 포장되어 나올 때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플라스틱 포장 속에 음료보다 훨씬 가득 차 있는 죄책감을 같이 마셔야 했다. 학교 급식실 큰 통에 담아 와서 각자의 컵에 따라 마시는 구조면 충분할 텐데... 얼린 홍시 하나도 개별 포장이었다. 물론 그에 따른 문제도 간단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고민을 하면 왜 방법을 못 찾겠나? 아직은 우리의 절실함과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포장0’ 소비 운동


  병과 용기를 들고 가서 포장 안 된 농산물과 식료품을 담아 사 올 수 있는 가게가 더 늘어나야 한다. 독일의 포장지 없는 식료품점 오리기날 운페어팍트(Original Unverpackt)나 화장품점 네이키드 숍(Naked Shop), 영국의 슈퍼마켓 언패키지드(Unpackaged), 미국의 더 필러리(The Fillery), 한국의 더 피커(The Picker) 등과 같이 플라스틱0를 추구하는 가게가 주변에 많아져야 한다.


  나 어렸을 적만 해도, 물론 포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집 앞 구멍가게들이 모두 포장0 가게였다. 유리 칸막이 된 진열대 안에 눈깔사탕, 독사탕이며, 고구마 과자를 비롯한 모든 과자들이 포장지 없이 들어 있었고 거기서 덜어 담아 저울에 근으로 재서 팔았다. 담아 갈 때도 봉투는 모두 재활용한 폐교과서 종이나 소위 회푸대(요즘 쌀 포대 속지 같은 연한 모카색 종이류를 일컫던 이름) 종이 따위로 깔때기처럼 붙여 만든 것들이었다.


  식재료를 사기 위해 로컬푸드 매장에 자주 가는데, 친환경 농산물을 표방하는 이곳의 거의 모든 농산물조차도 비닐 포장 안 된 것이 없다. 집에 가져와 손질하다 보면 끔찍하다는 생각에 몸서리가 쳐지곤 한다. 이제는 조금 덜 편리하게, 조금 덜 바쁘게, 조금 덜 깨끗하게 살 준비를 해야 한다. 환경적 소비자 운동이 아니고서는 이를 견인할 수 없다. 운동이 일어나야 가게를, 기업을 움직일 수 있다.




  그 운동의 중심에 나 같은 전업주부가 있다. 지구와 다음 세대를 위한 나쁜 소비의 중심에 서서 끝없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살아갈 것인가? 친환경 소비의 중심에 서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문제로다. 갈림길에 서 있는 나다.


  무슨 호러물처럼 전개되었지만 내가 맡고 있는 것이 바로 ‘살림’ 아닌가? 나를 살리고 가족을 살리고 지구를 살리자.

  “그 주인공은 바로 나야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