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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퇴직 교사, 전업주부로 살기 1




글 |정우식 회원


"학교 밖으로 나와 나에게로"





 

살림남, 비로소 내가 보인다.

나는 지금 전업주부로 산다. 여섯 식구 중에 아들 둘은 대학 생활로 다른 곳에서 따로 지내고, 집에서는 구십 가까운 인생 황혼기의 어머니와 갱년기 아내와 사춘기 늦둥이 딸, 이렇게 세 여자(?)와 같이 산다. 언뜻 우리 집 세 여자의 이런 프로필로만 보면, ‘그 남자 엄청 힘들겠구나,’ 여기실지 몰라도 그렇지 않다. 사는 게 재미지다.

살림을 하고 싶었다. 아이들 학교생활이며 진로를 뒷바라지하고 싶었고, 치매 전 단계쯤에 와 있으신 어머니의 외로움을 방치할 수 없었고, 원거리 출퇴근하는 아내에게 가사노동의 부담까지 지우고 싶지 않았다. 요즘 주 활동 무대는 주방이다. 장보기며 요리며 살림이 원래 체질에 어느 정도 맞는 편이기도 해서 소질에 맞는 보직을 찾은 것 같아 즐겁다.

살림하다 보니 내가 잘 보인다. 내 성격이며, 삶의 태도며, 생활양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나는 자신이 제법 친환경적인 사람인 줄 알았다. 웬만한 것은 재활용, 재사용하고, 덜 소비하며 살려고 노력해왔으니까. 그런데 웬걸? 정작 살림을 맡아 하면서 보니까, 하루에도 엄청난 일회용 비닐과 플라스틱과 스티로폼을 소비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퇴직 후 느낀 첫 충격이었다. 장보기 해온 모든 식재료의 옷은 모두 이런 것들이었다. 농산물이든, 가공품이든, 주방용품이든, 예외란 없었다. 의식은 몰라도 살아가는 행태는 친환경의 끝판왕이 아니었다. 정작 내가 이런 삶의 태도와 생활양식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퇴직 전까지 학교에서 오랫동안 재활용장 분리배출을 담당하고 지도했다. 내 분장업무가 아니어도 줄곧 그래왔다. 그래서 하루면 엄청난 양의 재활용품이 나오는 풍경에는 이미 익숙했고, 불필요한 초과 소비에도 인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남들이 벌인 일이지 나는 아니었다. 그런데 살림남으로 살아 보니 그게 나였다. 내가 보인다.

(이밖에, 나의 감정선이며 성격의 드러남과 살림하면서 깨닫는 수많은 삶의 잠언들은 분량 때문에 언제 따로 다른 지면을 기약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한 예만 들고 서둘러 마무리한다. 오늘은 퇴직 후 첫 글이니까 퇴직 얘기만 조금 더 보태려고.)

 


퇴직하면 뭐 하려고?”

지난 2월 말에 삼십몇 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퇴직했으니, 3월부터 교사가 아닌 민간인(?)으로는 백일 갓 지난 갓난아이다.

정년퇴직이 5년이나 남은 상황에서, 누구나 선망한다는 안정된 직장을 그만두고 명예퇴직을 결심하는 것은 그리 쉬운 선택은 아니었다. “갑자기?” 오십 대 후반의 나이에 너무 일찍 결심한 것 아니냐는 우려를 해준 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일찍이 퇴직 결심을 알아챈 이들에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왜 벌써 퇴직해?”퇴직하면 뭐 하려고?”였다.

퇴직하면 뭐 하려고?”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했다. 대개는 퇴직 후 생계 대책을 묻는, 질문이었다. ‘사람들은 뭘 하려고 퇴직하나 보다.’, ‘나만 이상한 건가?’ 이런 생각이 스치기도 했지만, 이른 나이에 퇴직을 선택했을 때는 제 나름의 다른 어떤 인생 설계가 있어서 아니겠느냐는 의도였을 터다. 그때마다 쉽게 대답했다. “뭐 하긴, 그냥 아무것도 안 하려고 퇴직하는 거야.” 실제 그랬다. 애당초 퇴직 후 인생 설계 같은 것은 따로 없었다. 연금 외에 다른 생계 대책 또한 없었다. 경제적으로나 현실적으로는 무작정 퇴직이다. 계획 없는 가출이나 다를 바 없다.

 


왜 벌써 퇴직해?”

문제는 왜 벌써 퇴직해?”였다. 대답하는 것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그랬다. 물론, “퇴직 안 할 이유도 따지자면 수십 가지는 되던데, 퇴직할 이유는 100가지도 넘어.”라며 둘러대듯 말한 적이 많았지만, 퇴직 1년 반쯤 전부터 막상 구체적으로 퇴직 결심을 하려고 생각하니 고민은 적지 않았다.

어떻게 선택하고, 어떻게 일궈온 교직인데’, ‘고교 시절부터 오로지 교사가 되려고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까지 바꿔가며 교사에 맞춰 살아온 세월이 아깝지도 않아? 학교 아이들만 바라보며 살아왔잖아? 이제 어떻게 버리고 떠날 건데?’, ‘늦장가로 애들도 아직 어린데’, ‘대학생 둘에다 늦둥이 중딩까지 헤쳐가야 할 앞길이 창창하잖아.’ 등등 교직을 천직으로만 여기고 살아오던 내 안의 울림부터 현실적인 걱정까지 속생각이 가득했고, “선생님 떠나시면 이제 학교는 어떡해요?”라는 입에 발린 소리 같기도 하고 환청 같기도 한 동료, 선후배 교사들이나 학생들의 따뜻한 넋두리까지 나를 붙드는 상념은 사실이지 수십 가지도 넘었다.

 


나와 가족에 좀 더 집중하려고.

하지만 퇴직할 이유는 더 차고 넘쳤을 뿐 아니라, 강렬하기까지 했다.

우선 나와 내 가족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다. 소위 사회적 삶을 살아오느라, 30여 년 교육 운동에 몸 바쳐 산다고 살아오느라 가족에게 소홀했고, 나에게도 무심했다. 아내는 말할 것 없고 아이들에게도 손길이 필요할 때 곁에 없는 일이 많았다. ‘아낼 믿으니까 됐지.’라고 자위하며. 이제는 한동안이라도 나와 내 가족을 위한 삶에 몰입하고 싶다.

나에게 집중하는 첫 번째 과제는 책 쓰기이다. 내 책을 쓰고 싶었다. 다른 이의 책은 몇 권 만들어준 일이 있었지만 내 책은 아직 한 권도 엮어낸 적이 없다. 그렇게 나를 챙기는 데는 항상 소홀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며, 풀꽃, 시 따위를 비롯한 잡다한 내 생각들을 정리해 담아내고 싶었다.

 


퇴직 결심의 최종 한방은 순전히 그놈이다.

그놈이 교육계에 나타나고부터 내 교육적 삶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살리는 데 몰두하기보다는 싸우며 살아야 했으니까. 지난 10여 년 동안 학교는 너무 망가지는 쪽으로 변했고, 그래서 속 편할 날이 없었다. 그놈이랑 같이 교육계에 묶여있는 게 더는 싫었다. 다른 퇴직 이유는 백이면 백 모두 즐거운 선택이고, 나와 주변을 살리는 생산적인 성격의 것이었지만, 그놈에 대한 분노만은 부정적이고 회피적이며 내 삶의 좌절과 맞닿아 있었다. 물론 백일 지난 지금은 여기서도 벗어나 한없이 자유로워졌다. 남 탓에서 빠져나온 지 오래다.

 


자유다. 해방이다.

밖으로 나오니 자유롭다. 세상 참 환하다. 나는 비로소 백일 동안의 긴 동굴 생활을 벗고 밝달 세상으로 나오고 있는 곰이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 겉모습은 곰인데, 내 내면은 이미 인간이 된 웅녀 같은 존재의 상태일 것이다. 드디어 겉도 속도 온전히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학교 밖으로 나오니 마침내 나와 만나고 내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