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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차이와 차별 사이에서

글 | 서용운 (회원)



몇 년씩 구독료를 내지 않아도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배달되는 기독교계 신문이 있습니다. 성의가 고마워서 늘 훑어보곤 합니다.

 

이번 주 신문 1면에 말 그대로 대문짝만 한 기사와 사진이 실렸습니다. “도 의회 차금법(차별금지법) 촉구안 저지라는 제목 아래 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건의안에 반대토론을 한 도 의회 의원 사진도 큼지막하게 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김제 어느 교회 장로라는 것까지 친절하게 소개하는 것은 기독교가 이렇게 앞장서서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그 의원의 인터뷰 기사까지 한번 읽어보았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우리나라에 동성애자가 늘어나고 필연적으로 후천성 면역 결핍증후군(AIDS)이 늘어난다는 의학계의 보고가 있다. 차별금지법은 단순히 동성애 뿐만 아니라 동물성애, 시체성애 등 사람이 갖고 있는 변태적 성욕을 표출하는......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를 파괴하고 국가를 파괴하는......” 여기까지만 읽다가 말았습니다. 그 상상력이 놀랍기만 합니다. 동성애자들을 아예 변태적인 사람들로 매도하는 그 생각이 참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권고했습니다만, 기독교계는 결사 항전의 자세로 반대하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그래서 그저 상식적인 일이 특별하고 대단한 이야깃거리가 된 것 같습니다. 이 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 시절 법무부의 주도로 처음 발의된 이래 18, 19, 20대 국회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계의 반발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기독교인들의 표를 의식해서 자진철회되거나 회기 만료로 폐기되었습니다. 21대 국회에서도 이 법은 같은 길을 걸을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기독교계에서도 차별금지법 모두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차별금지법에 포함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대한 항목입니다. 쉽게 풀어보자면 동성애자들이라고 해서 사회적으로 차별이나 불이익을 받게 해서는 안된다는 법을 만들자는 것인데, 기독교계에서는 그 법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지요. 동성애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허무는 죄라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참치회원들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먹고살기 힘든데 별 관심 없다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 반대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웬만하면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낙인찍어버리는 것은 예수의 가르침하고는 한참 멀기 때문입니다.

저도 성경을 좀 알기에 하는 말인데, 예수 당시에 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가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종교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과 그 추종자들이 그렇게 낙인찍어버린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면 죄인이라기보다 죄인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웬만해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 어울렸고 먹고 마시고 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그의 사랑에서 차별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웬만하면 교회가 죄인을 만들고 낙인찍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에 동성애는 사랑하는 방법의 차이정도로 생각하면 어떨까 합니다. 사람의 외모와 성격과 취미가 다른 것처럼 말이지요. 그것 때문에 가정과 사회와 국가가 흔들리고 무너진다고 하는 것은 지나쳐도 한참 지나친 소설 같은이야기가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무너진다면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 이성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따라 가정을 이루고 살았던 사람들이 질서를 유지하지 못하고 깨지고 상처 받고 힘들어하는 부부들, 자녀들을 저는 조금 더 가깝게 많이 보아왔습니다. 차이를 이유로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글의 제목을 차이와 차별 사이에서라고 했는데, 더 풀어서 말씀드릴까 합니다. 차이와 차별 사이에 들어갔으면 하는 말은 용납혹은 사랑이런 것이지요. 알고들 계시겠지만 예수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조건 없는 사랑과 환대 아니겠어요? 그의 사랑은 이웃 사랑을 넘어서 원수 사랑으로까지 확장함으로써 사랑의 의미가 혁명적으로 급진화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얼마나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는가가 최후의 심판의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밝히자면 마태복음 25장에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또 놀라운 것은 성경에서 최후 심판이라는 내용을 보면 종교적 소속성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기독교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다른 이에게 환대와 사랑을 실천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이라는 것은 다른 신분, 생각,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으니, 당시 소위 종교 지도자들에게는 예수가 눈엣가시 같았겠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죄인이라고 낙인찍은 사람들과 차별·차이를 앞세워 자신들은 꽤나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아마도 21대 국회에서도 포괄적 차별금지법에 대한 논의는 사회적 합의가 더 필요하다는 이유로, 쉽게 말하면 기독교계가 반대하므로 미뤄질 가능성이 많아 보입니다.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차별금지법이 통과 되든지 안 되든지 그것 때문에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가 파괴되는 일은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더위 잘 이기시며 지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모든 기독교계가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제 아들 나이쯤 되는 어느 국회의원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했던 말을 옮겨 적으며 마칠까 합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할 때까지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