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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글

글 | 이주희  회원




2010년 나는 임실의 작은 학교로 발령을 받아 있었는데 하늘이 높디 높은 어느 가을날, 이경한 교수님께서 불쑥 학교에 찾아오셨다. 갑작스런 방문에 놀라 운동장으로 나간 나에게 교수님은 대뜸 글 한번 써봐라.”말씀을 던지시고는 어버버버 하고 있는 나에게 손을 흔드시더니 내 삶에 없던 글쓰기라는 뜻밖의 숙제를 남겨두고는 운동장에서 사라지셨다. 그렇게 하여 글이라는 걸 잊고 살았던 내가 회원통신에 글을 쓰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가을날 이후 내가 십년씩이나 꾸준히 글을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그 덕에 차곡차곡 많은 글들이 내 삶에 쌓이게 되었다.

 

회원통신에 방 한 칸을 내어주셔서 빚어지고 태어난 나의 글은 종이위에 자판을 두드려 탁탁 적혀있는 것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살아있어 생명력 있게 움직이고 텅빈 곳을 새로운 걸로 채우기도 하였다, 어질러진 생각도 상황도 정리해내는 그야말로 슈퍼파워 만능재주꾼!! 무엇보다도 캄캄한 바다에 넘실대는 파도만 보이고 어디로 갈지 모를 때 이쪽을 보고 가야해라고 은은히 비추이는 달빛 같은 나의 글을 만날 때면 어김없이 느껴지는 감격과 안도, 확신. 이럴 때 나는 머얼리 집을 떠나 내 자신을 떠나 세상 밖으로 해답을 찾아 헤매지 않아도 된다. 이미 내 마당의 파랑새를 나는 알고 있어서다.

올해 학교 동료 선생님들과 배움과 성장을 위해 수요일마다 공부할 주제를 상의하다 글쓰기를 해 보기로 하였다. 처음엔 아이들 글쓰기에 대해 공부해보자로 시작하였는데 하다 보니 선생님도 글쓰기를 하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말로만 글을 쓰라고 할 수 없다는 걸 함께 공감하게 되었다. 마침 학교로 중학교 국어선생님께서 오셔서 살아있는 글쓰기에 대해 연수를 해주시는데 그 선생님께서는 아이들과의 있었던 일 특히 갈등과 문제 상황에 대한 글을 쓰며 교사 자신을 성찰해나가는 글쓰기를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선생님이 쓰신 글을 함께 읽어보며 첫시간과 두 번째 시간을 보냈다. 그 글속에는 아이들과 수도 없이 부딪히는 울퉁불퉁 뾰족하기만 한 선생님과 아이들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우리 앞에 보여 지는 선생님은 대단한 사람처럼 느껴지는데 글속에 선생님은 참 권위적이고 고집스럽고 옹졸하기까지 한 작디 작은 사람이다. 선생이라는 직업, 거인이 되어 아이들 앞에 서 있는 때가 훨씬 많다는 걸 아니 우리들의 사는 세상은 작디 작은 못난 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크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들로 한껏 치장하고 부풀리며 살 때가 대부분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선생님의 글속에는 거인같은 한 사람이 아이들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처절할 정도로 못나고 쭈그러진 자신을 부끄러움도 잊고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강의를 듣는 동안 눈물이 나서 고개를 자꾸 숙였다.

 

선생님께서는 다음시간에는 우리더러 그런 글을 써오라는 숙제를 내셨다. 작은 학교여서 고작 선생님은 7명이고 서로 가까웁게 지내고는 있으나 그런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들을 다른 것도 아닌 글로 써서 나누어야 한다는 것이 보통 부담이 되는 게 아니었다.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 연수날은 가까워지고 다들 만나면 썼냐는 물음과 아직 못썼다는 답만 오갔다. 드디어 연수를 해주시러 선생님께서 학교에 오셨다. 다들 마지못한 얼굴로 숙제를 내밀고는 서로 돌아가며 각자의 글을 낭독도 하고 조용히 읽어도 가며 교직생활 중 있었던 부끄럽고 풀지 못했던 갈등들을 아니 그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못난 자신을 조심스레 꺼내었다.

우리들의 글속에는 아이들과 혹은 학부모들과 있었던 꽉 묶여버린 매듭, 불편, 고통, 그리고 그 기억들을 오랜 시간 피해 온 흔적들이 고스란히 있었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그런 자신을 충분히 꺼내놓은 선생님의 글일수록 그 상황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어 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중심에 두고 자신만 보던 이야기는 어느덧 그 아이의 마음과 생각에 집중되어 그 때 그 아이는 어땠을까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고통과 대면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어려운 시간을 지나 만나게 되는 그 순간이 글 속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된 아들 녀석이 늦은 밤 집에 돌아와 학교 백일장대회에서 글을 썼는데 선생님께서 자신이 쓴 글을 책에 실을 거라고 하셨다며 싱글싱글 웃었다. 뭘 썼는데 라는 엄마의 질문에 안 보여줄 건데 라며 놀리듯 말하고는 녀석은 샤워하러 가버렸다. 아들 방에 잠깐 들어가 불을 켰는데, 아니!! 녀석이 쓴 백일장 글 원고가 소파에 나를 읽으세요 하면서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닌가. 저기 저 욕실에 물줄기 소리는 나고 원고는 펼쳐져 있고 궁금한 나는 녀석의 글을 몰래 읽을 수 있었다. 신이 나서 읽기 시작하는데 제목부터 갑자기 슬퍼진다. ‘우둘투둘한 나의 피부와 추우욱 쳐진 어깨

아들녀석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어서 생긴 고민들, 그리고 몇몇 아이들이 놀려대어 속상했던 일, 숨기고 싶어 감추려 했던 행동들... 어쩌면 이렇게 자세히도 자신의 일들을 담담히 고백해내던지 그런 아들의 글을 읽어 내려가는데, 세상에 글 말미에 이런 말을 써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끝내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사실 나는 우둘투둘한 피부와 추우욱 처진 어깨가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게 아니라 그 당시 우둘투둘한 피부를 숨기고 안 좋게 생각한거 또 살이 찐 게 부끄러워서 숨기려 어깨를 오므리려 한 생각. 지금 보면 생각만 조금 다르게 하면 되는 것을 숨기려하고 부끄러워 한 그 생각을 지금 나는 숨기고 싶고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래도 이 자리를 맞아 이야기 할 수 있어 다행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시원하다고 말한다. 지금 내 기분이 그렇다. “ 너무 시원하다.”

 

글이란 무엇인가?

말이 글이고 글이 말이다라고도 하지만 얼음과 물이 서로 같지만 다르게 쓰여지는 것처럼 글만이 할 수 있는 쓰임과 자리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빛나는 순간을 붙잡아 자꾸 잊고 휩쓸려 살아가려는 줏대 없는 삶에 중심을 잡아주고 피하고 싶던 묵힌 시간들을 끄집어내 다시 만나게도 하는 것이다. 자신에게만 꽂혀있던 시선을 다른 이에게 두게 만들어 맺혀진 매듭을 느슨하게 하는데다가 깊숙한 부끄러움을 토해 낸 자리에 시원한 기분과 진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삶의 지혜로움을 가득 채워 주고 추우욱 쳐진 어깨를 활짝 펴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글들이 살아서 숨쉬고 있기에 우린 조금 더 희망이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