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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도시] 4.4. 어디서나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

글 | 황지욱 회원


 

 

무엇이 골고루 행복하게 산다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왜 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2~3년전 이 연재글을 시작할 때만해도 도시계획가로서 지역불균형, 소득격차, 청년실업 이런 차원에서 글을 써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2020pandemic 시대에 빠져들면서 내 생각의 범위는 현저히 넓어졌다. 행복이란 나 혼자 잘 산다고, 또는 우리나라 혼자 잘 산다고 지켜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 제목으로 제시한 어디서나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란 단순히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를 다 들여다보는 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제는 아무리 지구의 저 멀고먼 나라에서 아주 작은 문제가 터졌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가볍게 볼 수 없는 지구촌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에서 어디서나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 코로나시대 이후를 생각하며 얼마전 페이스북에 썼던 글, ‘어느 도시계획가, Covid-19 시대 이후를 생각하다를 소환해 본다. 그리고 오늘 주제에 맞춰 내용의 일부를 고쳐 옮겨놓는다.

 

우리는 너무도 빠른 20세기를 살아왔다. 엊그제가 20세기였는데 숨 돌릴 새도 없이 벌써 21세기의 1/5을 또 그렇게 보내버렸다. 4차 산업혁명이니 big dataAI니 하고 외치면서 말이다. 그러는 사이 197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지구의 환경재앙을 걱정하며 로마클럽이 결성되어 경제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으니 그만 정신을 차리자’(limit to the growth)라고 던졌던 경고는 쇠귀에 경 읽기처럼 느껴졌다. 2000년대 말엽에 이르러서도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라는 새로운 해법으로 성장지상주의 STOP’을 외쳐댔으나 그칠 줄 몰랐다. 오히려 지구환경은 급속도로 악화되었고, 지구 자체가 심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북극의 빙하가 줄줄이 녹아 내렸고,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는 한방에 지구를 회복불능의 오염 투성로 만들어 버렸다. 오존층은 뚫려버렸고, 수많은 종(spicies)은 사라져갔다. 그런데도 그 어느 것으로도 인간의 개발욕심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성장'은 수많은 국가들로부터 생존을 위한 지고의 선처럼 받아들여졌다. 중국은 수많은 사람들을 미세먼지로 365일 마스크에 의존해 살게 만들었음에도 눈꼽만큼 책임질 생각을 갖지 않았다. 1~2차 산업 혁명기에 온통 대기오염과 온갖 질병으로 수많은 피해를 일으킨 유럽의 그 어느 나라도 대기오염, 인류의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니 말은 다했지만 말이다. 원자로가 터져 토양과 수자원이 통째로 오염되었어도 뻔뻔하게 추가로 해양을 오염시킬 궁리에만 몰골한 일본을 보면 더 이상 그 누구가 아무리 멈춰달라고 해도 멈춰질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부의 불균형은 어떠한가? 20151022일 옥스팜 인터네셔날(Oxfam International)지에 실린 기사에는 2015년 그 해에 전세계 상위 부자 1%가 전세계 부의 50%, 거꾸로 세계 하위 50%의 인류가 전세계 부의 1%를 나누는 부의 독식의 골든크로스가 발생한다고 하였다. 세상에는 시간당 1 USD도 못받는 노동자들이 가득해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헤어나올수 없는 굴레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환경재앙을 넘어 사회적 불평등이 폭발 직전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래서인지 지구는 화가 났다. 화가 나도 단단히 난 것 같다. 그 잘난 인간이 초래한, 하지만 아주 작아보였던 역병이 이제 전 세계를 휘몰아치고 있다. 100세 시대를 넘어 200세 시대가 당연한 것처럼 외쳐대던 인간들의 사회가 죽음의 공포로 집밖을 나서지 못하는 움츠림의 시대로 바뀌어 버렸다. 성장을 향해 일사천리로 달려가던 그 속도의 초침이 멈춰졌다. 세계 최강국이라며 눈에 가시같은 나라가 보이면 대놓고 전쟁도 불사하며 위협을 해대던 나라도 지금은 전혀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자기코가 석자다.

 

어느덧 4월이면 황사로 짙뿌연 하늘이 일상이던 날이 다시 내 어릴 때 맑은 공기를 선물해주던 그 날로 바뀌었다. 전쟁으로 위협하겠다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평화로운게 낯설다. 대기도 맑고, 물도 맑고, 화석연료를 태워내던 에너지소비량도 낮아졌다. 지구의 엔트로피(entropy)가 상당히 개선되는 느낌이다. 온통 바쁘게 돌아다니던 세상의 모습도 느껴지지 않는다. 효율성을 강조하며 뭉쳐야 산다며 메가시티니, 글로벌시티니 하며 세계 속의 서울을 외치던 모습도 왠지 약간은 시들해진 느낌이다. 세계정부는 사람들이 금력과 권력을 찾아 역병이 창궐하는 상황을 무릅쓰고 대도시로 달려들어가 살도록 계속 만들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안전한 삶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 수 있도록 사회메카니즘의 전환을 가져올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 듯도 보인다. 과연 집중이냐 분산이냐? 무엇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도시구조란 말일까?

 

일말의 희망이랄까? 사람들에게서도 조금씩 변화가 감지되는 듯도 하다. 사람들이 몰려봤자 역병에 더 빨리 그리고 더 심하게 노출될 수 있으니 차라리 어딘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조용한 마을을 찾고 있는 것같다. 그런데 그 찾는다는 게 대도시는 못 떠나겠고 그저 밀도가 조금 낮은 동네나 마을을 찾아들어가겠다는 정도니 근본적 변화는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직 정신을 못 차린건지 아니면 과거에 너무 물들어 있는건지, 역병의 진앙을 떠나야 안전한데, 그냥 옆방으로 옮기면 기술의 진보로 다 해결할 수 있다는 극히 안일한 20세기의 낙관주의적 생각에 빠져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혹시 나만 너무 심각하고 부정적인 것인가?

 

누군가 나를 그렇게 판단할지라도 나는 이제 빠름, 효율, 성장, 집중, 생산성, 경쟁, 잘남, 뭐 이러한 20세기의 단어가 어쩌면 이제 진정으로 우리 마음 속 첫번째 자리에서 내려올 순간이라고 보고싶다. 아니 내려와야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 이와 대비되는 단어가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역병 이후의 시대를 생각해보자. 아무 생각없이 그냥 "이 역병만 지나가라" 그랬다가는 또 다른 더 큰 역병이 올 지도 모른다. 그러니 정말 진심으로 고민을 해보자. 두려움에만 시달릴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제어할 정책적 전환이 필요하다. 이 말을 역병이 있어도 안전하게 기술을 개발해서 대도시에 몰려살자는 그런 기술만능주의적 사고를 주장하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않된다. 오히려 근본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이다. 도시계획에 관여하는 정치인들, 계획가들 그리고 공무원들이 깊이 고민할 것이 진짜 많다. 그 중에서 우리나라 도시도 3기 신도시로 수도권을 집으로 꽉꽉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 기회에 수도권의 알짜베기 일자리, 대학교육기관 나아가 공공기관 등을 지방으로 흩어 균형발전을 제대로 실현시키며 안전이 확보된 공간적 거리두기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골고루 행복해질 수 있다. 잠시는 흩는 비용이 더 들지 모르고, 우리의 개인적 타성과 욕구에 배치되어 지방으로 움직이는게 심히 낯설을지 몰라도 자연스레 따라 오는 것은 집값 안정이요, 지방에 대한 깊은 이해요, 나아가 지방소멸의 고민까지도 수그러들게 만들 것이다. '나의 삶'이라는 좁디 좁은 테두리를 넘어 '우리'가 어울어진 삶, 무엇보다 자연생명체와 공존할 수 있는 생각을 일상으로 얻을 수도 있는 지방에서 공동체성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는 느림도 충분히 그 가치를 인정받는 그런 사회를 말하는 거기도 하다.

 

올해 나달이 호주open에서 테니스 경기를 할 때 그 공에 맞았던 여자아이(?)가 뭔가 날라다니던 나방같은 것을 손으로 덥썩 잡아 경기장 바깥으로 가져다 버리는 것을 보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이다. 만약 우리나라 아이라면 어땠을까? '꺄악~ 꺄악~'소리치며 나방이 무섭다고 도망쳐 다니지는 않았을까? 자연에 대한 친근함이 부족한, 아니 아예없는, 그래서 반쪽짜리 삶밖에 살 수 없는, 자칭 '문명인들'이 자연과 어울려 살 수 있는 진정한 '문명인'이 되려면, 그래서 진짜 건강한 삶을 살려면 20세기의 사고인 '도시로, 도시로'에서 벗어나 '자연과, 자연과'를 배워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COVID-19 이후의 건강한 새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게다. 그것이 우리가 준비해갈 진정한 21세기가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앞서 썼듯이 수많은 종의 사라짐같이 인간도.... 끔찍해서 생각하기도 싫다.

 

행복을 찾는 고민의 과정에서 내가 만난 단어는 다시금 공존의 가치. 평화의 공존이 깨진 사회, 안전의 공존이 깨진 사회, 공존을 위한 부의 나눔이 깨진 사회는 결국 유리병처럼 작은 충격에도 너무 쉽게 부셔지는 위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하지만 세계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공존하고자 팔을 걷어붙치고, 서로 도우려할 때 사회는 밝고, 건강하고, 아름답게 변하는 것같다. 요즘 뉴스에서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침공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왠지 뿌듯하다. 그것만 듣지 않아도 작은 행복 하나를 더 얻은 것 같다. 어디서나 행복하게 살 수 있으려면 모두가 함께 힘을 합치려해야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길 바란다.

 

어느날 혼자 이런 말도 안되는 것같은 생각을 해보았었다. 내가 수백만의 경쟁을 뚫고 우주인이 되어 지구를 떠나 우주를 유영하기 시작했다. 수많은 경쟁을 이겼다는 생각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를 부러워할까라는 자기만족과 겹치면서 왠지모를 뿌듯함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거침없이 우주를 질주하고 있던 순간 갑자기 내 눈 앞에서 지구가 사라져버렸다. 지구 저 편 어느 곳에 있다던 원자력발전소의 폭발이 지구 전체를 마비시켜버린 것이다. 깜짝 놀란 나는 지구의 우주센터에 교신을 보냈다. “지구, 지구, 지구는 응답하라. 여기는 ....” 그런데 아무런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메시지를 보내도 전혀 답이 오질 않는다. 급하게 우주선을 돌려 지구로 돌아가려는데, 지구가 보이지 않는다. 돌아갈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나는 이제 온 우주에 혼자 남았는지도 모른다. ~ 혼자남았단 생각, 아니 돌아갈 곳이 없어짐. 엄습해오는 두려움. 이 황망함.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만약 나마저 없어져 버린다면 이 광활한 온 세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세상이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침묵만 흐르는 세상. 나 혼자 보는, 나 혼자 느끼는 이 세상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나는 행복을 성취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행복은 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