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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글 | 서용운 회원



마스크의 추억


  그 해 봄도 그랬습니다. 교정에는 제일 먼저 봄을 알리는 노란 산수유가 피었고, 하얀 목련은 피는가 했더니 봄비를 맞더니 맥없이 떨어졌습니다. 

  교내 방송에서 ‘상록수’나 ‘늙은 군인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학우들은 삼삼오오 학생회관으로 모여들기 시작하고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타도”, “유신 철폐”, “전두환은 물러가라” 학교에서 출발해서 팔달로를 거쳐서 시청 앞까지 나중에는 도청 앞까지 행진을 했습니다. 제대로 마스크를 쓰지도 못하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고, 어떤 이들은 얇은 비닐을 눈에 붙이기도 했습니다. 눈물, 콧물을 흘리고 재채기를 하며 부당한 역사 앞에 최루탄 가스와 맞섰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정치적 거리두기’가 내려졌습니다. 휴교령이지요. 학교 출입은 완전 봉쇄되었고 중무장한 군인들이 교문 앞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이 그 때를 ‘서울의 봄’이라고 하였고, 제 기억 속의 ‘전주의 봄’은 그랬습니다.



다시 마스크를 쓰며


  그 후로 벌써 40년은 지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시 마스크를 씁니다. 이번에는 ‘사회적 거리두기’라고 합니다만, 표현이 고상하고 추상적입니다. ‘방역적’ 혹은 ‘예방적 거리두기’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만, 그러면 더 힘들고 우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하튼 지금 우리는 굉장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류 역사가 기원전(B.C.)과 기원후(A.D.)로 구분되는 것처럼 지금의 역사는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구분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까 하는 것에 대하여 학자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이렇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인간들이 행한 환경 파괴나 기후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고 합니다. 동물들의 서식지가 파괴되고 동물 세계와 인간 세계의 경계선이 무너지면서 동물들의 몸에 깃들어 살던 바이러스가 인간들에게로 옮겨온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모든 일의 뿌리에 인간의 과도한 탐욕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금은 코로나19를 대처하고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겠습니다만, 풍요와 편리함, 탐욕이 얼마나 위험하고 치명적인 것인가를 너무나 비싼 대가를 치르며 배우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만, 제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까지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교회를 위한 사람은 없다


  코로나19가 신천지 집단에 의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그 뒤로도 여러 교회로부터도 감염 사례가 있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도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여 공중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엊그제는 교회들에 행정명령서까지 전달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합니다만, 사람이 교회를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있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셨거든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의 안전과 생명이 무엇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것들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에서의 예배에 대한 의무까지 덧입힐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고, 다르게 말하면 목사를 위해서 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을 위해서 목사가 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합니다. 앞으로 교회들이 ‘영생’이 아니고 ‘인생’에, ‘저 세상’이 아니고 ‘이 세상’에, ‘나중’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삶의 실타래를 함께 풀어가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부르는 노래 혹은 기도


  요즈음 심란한 마음을 달래면서 듣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느 날 아침 화초를 가꾸다가 문득 떠오른 노래입니다 제목은 ‘주여 이제는 여기에’입니다. 1970년대 김민기가 김지하의 연극 ‘금관의 예수’에 쓰일 노래들을 만들 때 탄생한 곡입니다. 제가 그 노래를 들었던 것은 벌써 40년쯤 전입니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 태양도 빛을 잃어/ 아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 어디에서 왔나 얼굴/ 여윈 사람들/ 무얼 찾아 헤매이나/ 저 눈 저 메마른 손길/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 아 거리여/ 외로운 거리여/ 거절 당한 손길들의/ 아 캄캄한 저 곤욕의 거리/ 어디에 있을까/ 천국은 어디에/ 죽음 저 편 푸른 숲에/ 아 거기에 있을까/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 우리와 함께하소서”(가사 요약)


  오랜만에 들어보니 마음이 처연해지면서도 위로가 됩니다. 김민기가 부른 것도 양희은이 부른 것도 성악가들이 부른 것도 있습니다만, 저는 김민기 버전이 좋습니다. 양희은이 부른 것 중에는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가 아니고 “오, 주여 이제는 그 곳에”로 “태양도 빛을 잃어 캄캄한 저 가난의 거리”가 “어두운 북녘땅에 한 줄기 별빛이 내리고”로 바뀌는 웃지 못할 코미디가 자행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아픔을 헤집으려 만든 노래가 삽시간에 북한을 동정하는 노래가 되었는데 누가 그런 코미디를 연출했는지는 굳이 제가 말씀 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코로나19로 빛을 잃고 얼굴 여윈 이 땅의 사람들에게, 특히 거절 당한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세월호 6주기를 맞는 이들, 교회의 예배를 잃은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노래를 드립니다. 이 노래가 지금의 제 기도입니다. 

  오, 주여 이제는 여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