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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도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곳

글 | 황지욱 회원



도시계획을 내 생의 업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말로 도시계획이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곤 한다. 멋진 도시를 만드는 것? 효율적인 도시를 만드는 것? 아니면 주도적인 경제성장형 도시를 만드는 것? 많은 계획가들이 이런 특정한 주제를 놓고 그런 이상향을 논의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점점 더 강렬하게 느끼는 것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도시계획가가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귀결된다. 조금 덜 멋질지라도, 조금 덜 효율적일지라도 그리고 경제적 부를 조금 덜 누릴지라도 서로 배려하며 웃으며 나누며 살 수만 있다면 그런 사회가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번에 잠시 해외출장을 다녀왔다. 남반구에 위치한 뉴질랜드였는데,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의 1/10인 500만명 가량이었고, 대학이라곤 8개의 국립대학 밖에 없었다. 산업도 우리처럼 세계 1~2위를 다투는 삼성이니 LG니 하는 대기업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은 4만불(USD)을 넘어섰고, Auckland University는 세계 80위권(QS Ranking)에 위치하고 있었고 19년전 폴리텍 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승격한 Auckland University of Technology도 세계 200위권에 자리잡고 있었다. 무엇보다 범상치 않았던 것은 국민 모두가 사회적 배려에 익숙해 있었고, 이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얼마 전 뉴질랜드에서 테러사태가 일어났었다. 이민자를 대상으로 일으킨 총기난사 사건으로 5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가진 긴급 기자회견에서 뉴질랜드 총리 Jacinda Ardern(재신다 아던)은 이 날을 “One of New Zealand’s darkest days”(뉴질랜드 역사 상 가장 어두운 날 중 하나)라고 말하며 뉴질랜드는 절대 테러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선포했다. 셀 수 없으리만치 많은 국민들도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범인이 잡혔을 때 그는 뉴질랜드 사람이 아닌 호주인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렇다고 호주 사람을 이 하나의 사건으로 매도해서도 안 된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포용과 배려’다. 뉴질랜드 총리의 행동을 보면서 그리고 뉴질랜드 국민들의 행동을 보면서 무엇보다 다양한 이민자들을 받아들이고, 이민자들에게 관대한 뉴질랜드의 모습을 보면서 모두가 한데 어울려 살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나라의 모습을 보며 이것이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큰 틀에서 이렇게 모든 인종이 서로 배려하며 포용하며 살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면, 작은 틀에서는 바로 사회적 약자나 강자도 함께 서로 배려하고 포용하며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도시계획가가 계획을 통해 실현해야 할 가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틀에서의 배려와 포용을 위해 즉, 경제적 약자와 강자 그리고 신체적 약자와 강자 이 모두가 차별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장치와 계획적 도구가 철저히 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제도적 장치는 모두가 지켜야하는 세밀한 원리를 제공해 줘야 하며, 계획적 도구는 모두가 이것을 철저하고도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설계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쉽게 뉴질랜드의 사업가와 나눈 이야기로 이를 풀어보도록 하겠다. 그는 회사의 대표로서 부유했지만 벌면 벌수록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것에 대해 약간의 불만이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사회 전체가 투명하기 때문에 모두가 세금을 내고 있으며, 그리고 국가는 그 세금을 가지고 국민 모두를 차별없이 보살피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자랑스럽게 세금을 낼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철저한 제도적 장치와 국가가 국민을 위해 설계한 복지는 도구적 장치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혜택을 누리기 위해 많은 이민자들이 뉴질랜드로 들어오고도 있다. 하지만 뉴질랜드라는 사회 속에 들어온 이민자들은 빠르던 늦던 자신들의 행동과 사고를 다시 뉴질랜드의 제도와 정책에 맞추어가고 있다.


갑자기 글을 쓰다 문뜩 “내가 사회적 약자의 배려와 관련된 글이 아니라 뉴질랜드 얘기만 싫컷 다루는 것 아니야?”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말씀을 드린다. 저의 진의를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전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은 ‘나 밖의 대상은 무조건 배려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나보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눌러버려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 나보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무시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 나보다 배움이 덜한 사람은 바보취급 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고, 나보다 약한 사람은 무시받아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보다 권력이 없는 사람은 내가 앞서서 보호해 줘야 할 사람이고, 나보다 부유하지 않은 사람은 내가 세금을 더 잘 내고 양보해서 그들도 균등한 기회를 누릴 수 있도록 해야하고, 나보다 배움이 덜한 사람은 나의 앎을 나눌 수 있도록 해야하고, 나보다 약한 사람은 더욱 강해질 수 있도록 언제나 도와야 한다고 믿는다. 


“누구나 나 때문에 웃을 수 있다면” 누구나 나의 행동과 나의 말 때문에 웃을 수 있다면 나는 이것이 이뤄지는 사회가 진정으로 행복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내가 강자라서 약자를 배려하는 뭐 그런 또 다른 형태의 위계사회는 정말 전근대적 사회라고 생각한다. 


만약 아베가 이런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그리고 시진핑이나 트럼프나 그 어떤 정치지도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자신들의 국가를 경영하게만 된다면 아마 세상에서는 약자의 배려, 포용 이런 단어를 굳이 쓰지 않아도 진정한 포용과 배려가 이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도시계획의 차원에서 사회적 약자를 대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 하나 있어서 소개하려고 한다. 나의 페이스북 친구 중에 뇌종양 수술을 받고 재활 중인 언론평론가 유창선 박사가 계시다. 그분께서 수술 이후 처음으로 병원을 나와 서울 청담동 거리를 걸은 경험을 글로 남겼다. 더 자세한 것은 그분의 책 ‘나를 위해 살기로 했다 죽음의 문턱에서 알게 된 것들’을 읽어보시면 좋을 듯하다.



“수술 이후 처음으로 어제 병원에서 나와 청담동 거리를 걸었다. 사복을 입고 휠체어를 갖고 아내와 함께 병원을 나섰다. 재활운동실에서야 많이 걸었지만, 실제 거리를 걷는 것은 달랐다. 오가는 차량을 살펴가며 울퉁불퉁한 바닥의 거리를 주변 구경을 해가며 걷자니 한동안 정신이 없었다. 마치 시골 벽지에서 처음 상경한 사람이 복잡한 거리를 보고 정신없어 하는 모습이라고나 할까. 가끔 힘이 들 때는 휠체어를 타기도 했다. 다음 주말쯤에 1.4km거리에 있는 코엑스에 걸어가서 <기생충>을 볼까 진지하게 고민했었는데, 아직은 무리인 듯하다. 130분의 상영시간도 부담스럽고. 지난주 연이틀 병원 지하층에서 6층까지 계단을 걸어 오르내려서 근력에 자신감이 생겼었는데, 거리로 나가보니 좀더 체력을 단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했을때 몇배의 운동을 하며 요즘 지낸다. 익숙하게 걷곤했던 그 거리에서 보행 연습을 새로 시작하게 되었다. 새로 태어났다는 말이 과장은 아닌 듯하다.”(유창선, 페이스북 2019년 6월3일, https://www.facebook.com/changseon)


이 글을 읽어보면 우리의 도시공간이 얼마나 건강한 사람만을 위해 만들어진 것인 깨달을 수 있다. 병원의 재활운동실과 실제 거리가 얼마나 달랐을까? 나는 언제까지나 강자일수만 있을까? 가장 약한 약자를 생각하며 계획을 수립하고, 설계한다면 그 어떤 종류의 약자도 힘들지 않고 편하고 행복하게 걸으며 살 수 있는 도시가 만들어지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