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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일기]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글 | 이주희 회원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나에게는 그런 것들이 많이 있었다. 안된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내 교실과 아이들과 삶에 선을 그어두고는 가능치 못한 걸로 확실한 분류를 해두었던 것이다. 차곡차곡 안 되는 것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참 많이 편해졌다.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시스템으로 학교일도 착착착, 가정에서도 척척척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까지도. 안정적인 시스템을 장착한 나의 삶은 숨 쉴 만큼만 엔진을 가동하며 세상속에서 잘 유영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진짜 나다운 내가 그리울 때가 있다. 이따금씩 찾아오는 그 그리움이 안정과 효율과 성과의 결과적 삶을 향해가는 내 삶의 시스템에 조금의 틈을 내고 있단 걸, 나는 알아차리게 되었다.


가을 바람이 좋은 저녁, 남편과 걷다 이렇게 물었다.

“진짜 나는 어떤 사람일까?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어? 누군가 말해주는 당신 말고 오롯이 내가 느끼는 나말이야.”

그랬더니 남편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아는 건 하나밖에 없어. 내가 나를 모르고 있다는 거.”


나를 아는 누군가의 말들이 모여 나의 머리카락이 되고 눈동자가 되고 그들이 원하는 옷까지 입고 세상과 사람들이 말하는 방향으로 걸어간다. 내가 원하는 것처럼 믿으면서. 이런 바보 같은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보았다. 그런 생각을 하다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내 아이들에게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게 된 것이다. 내가 나를 잃어버리고는 살아온 시간들, 그런데 나는 내 아이들에게도 엄마가 기대하고 바라는 삶을 살아주기를 은근한 무게로 그들의 삶에 실어주며 그들의 그들다운 시간을 잃어버리게 하고 있는 것이다. 엄마가 기대하고 바라는 삶은 그렇게 세속적이지만은 않은 데다가 행복의 최소한의 것들을 담았고 거기에 너를 사랑하기까지 한 완벽한 레시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나름의 변명. 그 변명 뒤에 넣어 둔 최소한의 것들은 어디서 온 것인가? 세상의 온갖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보장받고 싶은 안정의 티켓을 손에 쥐길 바라는 것이고 타인들로부터 끄덕일만한 적정한 인정을 받길 바라는 것이고 거기에 자신만을 위해 살지 말고 주변도 세상도 살피며 살라는 이타적 주문까지, 이 모든 건 누가 욕망하고 있는 것인가?


2학기 개학을 하자마자 아이들과 서울로 고속버스를 타고 올라가 지하철과 도보로 1박 2일 다닐 체험학습 계획을 세웠다. 1학기 때 이미 수학여행도 다녀와 더 이상의 1박 2일 체험학습 계획은 없었지만 아이들과 매월 역사발자국 따라걷기를 하면서 기존의 체험학습에서 느꼈던 불편한 감정들에 대한 대안을 찾아가는 내 나름의 실천을 경험 한데다가 제법 잘 걷고 힘든 것도 즐기며 해나가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보면서, 조금 더 아이들이 중심이 되고 몸으로 겪어가는 활동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학교현장에서 일 년 계획에 없던 1박 2일 체험학습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교장, 교감선생님의 흔쾌한 승낙 덕에 아이들과 함께 서울 가는 고속버스에 타게 되었다.


준비된 전세버스를 타고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않는 체험학습. 선생님이 앞장서고 아이들이 뒤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앞장서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체험학습. 모든 것이 세팅 되어져 있고 아이들은 그저 그곳에 밀물처럼 들어갔다 썰물처럼 빠져 돌아오는 체험학습이 아니라 가는 길 하나하나 아이들이 만들어가고 이끌어가는 체험학습이라는 것에 아이들과 먼저 합의를 하였다. 서울한번 안가보고 지하철 한번 안타본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이번 체험학습 전에 아이들은 팀을 꾸리고 여러 차례 사전모임을 가지면서 지하철 타고 내리는 방법, 이동경로들을 조사하고 함께 공유하며 직접 길을 찾아 가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공부해갔다. 1박 2일 동안 나는 뒤에서 잘못 가면 잘못 가는 데로 잘 가면 잘 가는 데로 쫄랑쫄랑 따라다니기만 하였다. 아이들은 복작거리는 낯선 서울거리를 신당동 떡볶이 타운에서 창신동 문구완구거리로, 롯데월드, 광화문거리로 남영동 민주인권기념관까지 지하철과 도보로 비오는 궂은 날씨에도 쌩쌩 잘도 다녔다. 물론 끊어질 듯 아픈 다리, 잘못 들어서 되돌아 왔던 길, 출근길 지옥철 속에 숨도 못 쉬고 껴있던 일도 포함해서 말이다.




나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걸어서 가는 체험학습은 위험하니깐 힘드니깐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느 결에 아이들과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을 스르르 아무 생각 없이 해버렸고 그 후, 나는 조금 달라진 것 같다. 가장 넘기 어려운 자신이 세운 생각의 허들을 뛰어넘은 힘찬 기분이 나를 휘감은 데다가 아이들과 서울의 거리를 이리저리 활보할 때 진짜인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다운 나는 무엇인지 여전히 모르겠다. 안다 하더라도 거기에 딱 맞는 말을 과연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매순간 순간을 나답게만 살 수도 없을 것 같다. 어떤 상황과 관계와 역할에서는 거기에 맞는 사람이 되어 있기도 할 테니깐. 그러면서도 나다운 내가 나를 움직여 내 삶의 심장을 뛰게 하고 따뜻한 피를 돌게 하고 그래서 또 나답게 움직여가는 순간들도 함께 존재하리라. 그러면 애써 세웠던 생각들도 스스로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고 나와 다른 답을 내리는 누군가도 좋은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40여 년간 체계적이면서도 편협한 효율 넘치는 이주희스러운 시스템에 조금 더 틈을 만들면서 안된다고 생각했던 것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스르르 하나씩 하나씩 지워가며, 그 안에서 신나있는 진짜 나를 만나며 나는 그렇게 살아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