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한 대표
여행은 나(만)의 장소를 경험한다. 여행자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의 자기 경험을 서로 나누며 공유한다. 장소 여행은 여행자의 주체적 노력을 많이 요한다. 이를 위하여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여행자의 사고다. 여행자로서 장소에서 그 장소와 충분한 교감을 하겠다는 자세가 요구된다. 여행자는 장소 안으로 들어가 여행의 묘미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장소 안에서 느리게 걸으며 작은 것에까지 눈길을 주고,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여행할 준비가 필요하다
여행 장소에서의 경험은 장소감을 낳는다. 장소에서의 경험은 장소감(場所感)을 만들어 준다. 장소감은 인식의 주체로서 여행자와 여행의 대상으로서 장소 사이의 관계 설정이라고 볼 수 있다. 여행자는 여행 장소와의 깊은 관계성을 가지면서 장소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한다. 여행자의 장소감은 장소에 대한 자신만의 감성을 갖게 해준다. 장소감은 오랫동안 장소를 기억하게 한다. 장소감은 첫사랑과 같아서 한번 형성되면 쉽사리 바뀌지 않는 특성도 가지고 있다. 여행자가 장소에 대해서 가지는 장소감이 주관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다수가 공감하는 상호주관성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한 장소감이 항상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장소성을 오독하는 경우 부정적인 장소감을 가질 수도 있다. 여행자의 장소에 대한 나쁜 기억은 부정적인 장소감을 가지는 데 큰 영향을 줄 수도 있다.
장소 여행은 융합적 사고이다. 장소에서의 여행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융합적 사고도 요한다. 모든 여행 장소는 그곳만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을 가지고 있다. 장소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의 토대 위에서 그곳의 역사, 경관 등을 창출한다. 그래서 여행자는 지역 사람들이 창출한 장소를 이해하고 장소를 경험하면서 장소감을 형성할 수 있다. 장소를 여행하기 위해서는 장소를 구성하고 있는 인자들을 융합시켜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장소에 존재하는 요소들을 융합시켜 장소를 경험하면 여행자는 더욱 깊이 장소 여행을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장소의 기후와 문학, 장소의 역사와 경관, 장소의 사회와 경제 등을 함께 살펴보면 장소를 더욱 알차게 경험할 수 있다.
아일랜드 서부에는 슬라이고(Sligo)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이곳에는 ‘이니스프리(Innisfree)의 호도(湖島)’로 유명한 예이츠(Yeats) 시인이 잠들어 있다. 슬라이고의 길(Gill) 호수 주변은 한적하고 목가적인 풍경이 넘쳐난다. 가끔 내리는 비는 호수를 더욱 촉촉하게 만들고 누구라도 시인으로 만들 기세이다. 이곳은 시와 문학과 기후가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장소다. 학창 시절 국어 시간에 ‘이니스프리의 호도’ 시를 읽었지만, 문학과 장소를 연관 지어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이곳의 기후와 예이츠의 시를 연계시키면서 여행하면 그 장소를 더 깊게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여행에서의 장소감은 여행을 마치고도 오랫동안 기억을 넘어 추억을 줄 것이다.
장소의 여행에서 기초 행위는 자연환경과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이다. 이런 이해를 위해서는 여행 장소에 관한 사전공부를 해야 한다. 여행하기 전에 장소에 관한 정보를 얻고 이 정보를 바탕으로 여행 장소와 대화를 한다. 여행 장소를 경험하는 데는 문학작품이 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는 ‘더블린 사람들(Dubliners)’과 ‘율리시스(Ulysses)’에서 더블린 시내와 주민들의 삶의 모습을 서술하였다. ‘술집을 하나도 스치지 않고 더블린을 통과한다는 것은 참 근사한 수수께끼 감일거야. 그렇지 않고 지나갈 수는 없지. 주정꾼한테서 돈을 짜내는 모양이야 아마. 3실링이라 기장(記帳)하고 5실링을 받아내는 거지.’(제임스 조이스, 48). 그는 어두운 시대에 더블린의 장소성을 높은 굴뚝의 검은 연기, 사창가, 오염된 하천, 파괴된 자연, 낙서가 난무하는 도심 등으로 그려내었다. 이처럼 문학은 작가의 사고를 토대로 장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리는 장소 안의 정체성을 찾아 경험하려고 여행한다. 여행자는 한 장소에서 장소성을 중심으로 여행하고자 한다. 여행자는 장소성과 함께 장소가 지닌 진정성도 함께 보고 싶어 한다. 장소의 드러난 속성과 함께 장소가 지닌 속살도 보고 싶어 한다. 이것이 여행자가 지닌 장소에 대한 이중심리이다. 짧은 시간 동안 장소를 방문하여 장소 안의 모든 것을 찾아보고 경험하려고 하는 시도는 여행자의 욕심이다. 본래 장소란 여행자에게 자신을 호락호락하게 내어주지는 않는다. 장소는 자신의 특성을 드러내 줄지언정 자신의 속내는 잘 드러내 주지 않는다. 여행자에게는 장소의 일부분만 이해하고 경험해도 충분히 성공적인 여행이다. 왜냐하면 여행자는 그 장소에서 어쩔 수 없는 타자이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여행 장소를 모두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체를 해야 하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지금도 여행자는 어느 장소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장소가 지닌 모든 것을 경험하지 못할지라도 여행자는 또 여행길을 나선다. 그 길을 기꺼이 떠나는 여행자가 장소를 조금이라도 더 자기화할 수 있다.
참고문헌
제임스 조이스(김종건 역), 2016, 율리시스(제4개역판), 어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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