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우성 (투명사회국)
경로당 방진망 설치 사업은 전형적인 재량사업비
공사대금 지급 소송, 경찰의 부실 수사 드러날까
암암리에 유지되어 오던 '재량사업비'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려하게 컴백했다. 이번에 얽혀든 사업은 경로당 방진망 공사다. 의원이 개입하여 '주민참여예산'에 특정 업체의 사업을 편성하고 계약을 몰아주기로 한 건데 언론 보도로 논란이 일자 사업이 일제히 보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을 통해 드러난 것만 해도 전주 지역에서는 이미 41개 경로당에 설치공사까지 완료했고 군산의 한 도의원은 자기 지역구 8개 면과 동의 114개 경로당을 대상으로 1억 5천여만 원의 예산을 세우기까지했다. 이외에도 익산의 경로당, 부안의 복지관 등 같은 업체의 견적서가 제출된 사례가 여럿 보도됐다. 전라북도가 시행하고 있는 ‘주민참여예산제’는 <지역밀착형 주민참여예산 사업 공모>를 통해 이루어진다. 지역개발사업이나 주민 공동이용시설 등의 개선·설치와 같은 주민 제안을 직접 예산 편성에 반영하는 것이다. 주민센터에 신청서가 접수되면 먼저 주민참여예산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사업을 선정한다. 이렇게 선정된 사업은 집행을 맡는 담당 부서의 검토 및 조정을 거쳐 최종 사업으로 확정되는데 이 과정에서 지방의원들의 개입이 노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많은 의원들이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주민참여예산제’의 취지를 훼손하고 과거의 ‘재량사업비’처럼 좌지우지하고 있다. 공모 접수도 없이 사업 목록에 올리는가 하면 업체 선정과 입찰 계약 등의 행정절차마저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 다반사다. 실화냐고? 그런 일이 진짜로 벌어졌다. |
주민도 모르는 ‘주민참여예산’
전주시 효자동 지역의 여러 경로당에 방진망 설치공사가 진행된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전라북도가 ‘경로당 기능 보강’을 위해 사업비 전액을 지원하는 <주민참여예산> 사업이었다. 그런데 경로당을 이용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방진망 설치가 다 끝날 때까지 이런 공사를 하는 줄도 몰랐던 이들이 많았다.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멀쩡한 방충망을 왜 뜯는지 의아해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시공을 맡은 A 업체는 “정부에서 공짜로 해주는 거”라는 설명으로 입을 막았다. 방충망과 방진망의 차이도 잘 모르던 경로당 이용자들은 해당 사업을 요청한 사람이 지역 주민이 아니라 바로 옆 선거구 시의원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에야 막무가내로 강행된 설치공사의 뒷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상한 부분은 이뿐만이 아니다. A 업체는 전주시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계약을 맺기는커녕 아직 사업이 확정되기도 전이었다. 하지만 해당 지역 내 41개 경로당에 방진망 설치가 깔끔하게 완료될 때까지 누구도 이 설치공사를 제지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담당 구청은 사실관계 확인도, 시공 관련 점검도, 그야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부 갈등으로 비롯된 고소·고발과 제보 등이 이어지면서 A 업체가 주목을 받지만 않았더라면 잠잠하게 지나갔을 관행이었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의혹은 증폭되었다.
‘외상시공’은 절차위반, 배 째라는 전주시
이미 폐지된 것으로 알려진 ‘재량사업비’가 과거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것이 전형적인 ‘재량사업비’ 추진 과정이라고 얘기한다. ‘재량사업비’ 사업의 경우 업체 선정부터 계약 및 집행의 전 과정에 있어서 행정은 언제나 충실한 실무 역할만 한다는 것이다. A 업체가 계약도 체결하기 전에 시공을 강행한 배경이다. 언론의 보도 내용은 이 같은 추측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기사에 따르면 A 업체의 대표와 친구 사이인 B 시의원은 공사 추진을 위해 같은 당 소속 C 도의원에게 ‘주민참여예산’에 해당 사업을 포함해달라고 요청했다. 관례에 따라 예산 편성이 이루어지자 A 업체는 시와 계약을 체결하기도 전에 B 시의원 지역구와 이웃한 D 시의원의 지역구에 있는 경로당들에 설치공사를 진행했다.
다른 지역에도 가맹대리점을 확대해가며 승승장구할 것만 같던 A 업체의 계획은 그러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언론은 취재를 통해 전주시 B 시의원과 C 도의원을 비롯, 또 다른 전주시 D 시의원까지 특정해서 보도를 이어갔고 익산, 군산, 부안 등 업체의 가맹대리점이 있는 지역에서 똑같은 내용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예산 편성이 이뤄진 사실도 확인했다. 경로당 방진망 설치 사업에 대한 논란이 일자 전주시는 업체 선정은 물론 사업을 확정한 적도, 계약을 체결한 적도 없다면서 일단 선긋기부터 하고 나섰다. 엄연한 관급 공사였는데 계약서 한 장 없이 ‘외상시공’을 해준 A 업체는 공사대금을 받을 길조차 막막해진 것이다.
A 업체는 사건 보도 초기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견적을 물어온 동사무소 직원의 말을 오해해서 설치를 진행”했다며 자신들의 실수를 인정했다. 하지만 경찰이 B 시의원에 대해 「청탁금지법」 위반에 따른 과태료 처분 선에서 수사를 마무리하자 곧바로 입장을 뒤집었다. 공사와 관련해서 드러난 A 업체의 법 위반 사실이 없고 방진망 설치공사는 전주시의 요구에 따라 이뤄졌으니 공사대금 5,800여만 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의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전주시는 절차를 위반한 공사였기 때문에 해당 비용에 대한 지급 의무가 없다며 맞서고 있다.
청탁한 사람은 있는데 청탁받은 사람은 어디?
만일 전주시와 A 업체 간의 진실 공방이 이어지면 이 과정에서 경찰의 부실한 수사가 드러나게 될 가능성도 있다. 경찰의 과태료 처분 근거는 「청탁금지법」 위반이다. 경찰이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지 않고 과태료 처분을 내린 것은 뇌물성 금품 수수의 증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사실상 부당한 청탁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주시와 A 업체 간 공사계약이 체결되지 않았고 대금을 지급한 것도 아니므로 징역 또는 벌금의 처벌을 해야 하는 범죄행위가 성립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바라보는 수사 결과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다. 개인 간의 소송도 아니고 주민들의 대표로 엄중한 책임과 권한을 위임받은 지방의원이 범죄행위를 기획했다가 미수에 그친 사건을 그저 과태료 처분의 수준으로 마무리한 것은 경찰의 의지 부족탓이라는 거다. 언론을 통해 실명까지 거론되며 연루된 다른 의원들에 대한 수사가 제대로 진행은 된 것인지, 집행은 되지 않았지만 예산 편성까지 이뤄진 과정에서 담당 공무원들이 절차와 규정을 위반하지는 않았는지도 의혹의 대상이다.
경찰의 과태료 처분으로는 B 시의원의 부당한 청탁에 따라 직무를 수행한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수사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언론은 경찰이 전주시청 소속 공무원들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혐의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정작 예산 편성을 담당한 도청 소속 공무원들에 대한 조사와 관련한 내용은 언급이 전혀 없다. 청탁을 한 사람이 밝혀져서 과태료 처분까지 받았는데 청탁을 받아서 이를 수행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무능한 부실수사? 정치권 눈치 보기 졸속수사?
따지고 보면 B 시의원으로부터 부당한 청탁을 받았다는 C 도의원도 법률 위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청탁금지법」 제7조에 따르면 C 도의원은 의장에게 B 시의원의 부당한 청탁을 신고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에 더해 C 도의원이 B 시의원의 청탁을 받아 도청 소속 담당 공무원들에게 해당 사업에 대한 예산 편성을 하도록 만들었다면 B 시의원에게 적용된 것과 같은 혐의로 과태료 처분 대상이다.
더 나아가 똑같은 내용의 사업 추진을 위한 예산 편성이 있었다는 익산, 군산, 부안 등의 다른 지방의원들에 대한 수사 여부도 의문이다. 수사가 없었다면 부실수사인 셈이고 ‘B 시의원 과태료 부과’라는 상한선을 미리 정해둔 채 대상과 범위를 제한해가며 수사를 마무리했다면 졸속수사다. 경찰이 언론의 보도 수준에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사건의 전반적인 내용 파악조차 못 한 것이라면 무능력한 것이고 알면서도 최대한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이라면 ‘정치권 눈치 보기’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이다.
‘주민참여예산제’를 회복해서 ‘주민자치’를 살려야
죽었지만 죽지 않은 괴물, 영화 속 좀비처럼 비틀대며 돌아다니는 ‘재량사업비’가 괘씸한 이유는 단지 ‘주민참여예산제’의 이름을 훔쳐 쓰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시민들은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민주적인 자치를 이루어서 지역의 가치와 성장의 잠재력을 스스로의 힘으로 이끌어내기 원한다. 이러한 시민들의 열망을 들러리로 전락시키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입맛에 맞는 지역구 내 선심성 사업을 추진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의원들의 후안무치가 견디기 힘들 정도이기 때문이다.
형식적인 ‘주민참여예산제’를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숙의 과정을 통해 실질적인 주민자치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여기에 있다. 행정이 베풀어주고 의원이 수완을 발휘해 혜택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의지와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고 진행되는 ‘주민 사업’이 가능하도록 다른 지역의 성공사례를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우리 지역의 특수성과 상황에 맞춰 적용할 수 있게 하는 다양한 시도를 끊임없이 이어가야 한다. 주민자치의 미래와 지역 발전의 성패가 여기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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