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정우식 회원
[퇴직 교사, 전업주부로 살기 6]
지난 4월호에서는 내 또래인 육십 전후 세대에게 부모 돌봄의 부담이 집중되어 있으며, 나 또한 노모를 모시고 사는데 그것의 힘겨움을 고백하면서 우리 세대도 ‘자신의 늙음’을 준비해야 함을 화두로 던졌다. 특히 자신의 삶을 혼자 힘으로 영위해갈 수 없는 시기가 다가오면, 현실적으로 노인복지 서비스나 요양시설 같은 사회적 의존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가짐부터 미리 다져둘 필요가 있음을 제안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설파한 사회적 효의 의미를 되짚어보았고, 이미 40여 년 전 옥중 서신에서 밝힌 그의 시대를 앞선 탁견을 소개한 바 있다. 효도의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유지 발전을 위한 몇 가지 개선점에 관한 대목인데, 그중에서도 내가 주목한 것은 맨 마지막 내용 ‘다섯째, 동거하는 부모 자식 간의 사생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가옥구조, 기타 생활방식의 개발’이다.
오늘은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이 지면에 글을 연재하는 주된 까닭이 한 번에 하나 정도씩은 생활 속에서 건져 올린 삶의 화두를 여러분과 공유해보려는 데 있음을 놓치지 않고 읽어주셨으면 한다.
배려가 상관으로 또 간섭으로
배려와 상관과 간섭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먼저 오늘 글에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가 여러 차례 기술될 예정이니 지루하더라도 각오하고 읽어주시기 바란다. 공자와 칸트가 중시한 정명(正名)을 위함이다.
‘배려(配慮)’는 사전에 ‘여러 가지로 마음을 써서 보살피고 도와줌’으로, ‘상관(相關)’은 ‘자신과는 관련 없는 남의 일에 대해서 간섭하거나 신경 쓰는 일’로, ‘간섭(干涉)’은 ‘관계없는 남의 일에 부당하게 참견함’으로 나와 있다.
상관의 기본의미는 ‘서로 관련을 가짐. 또는 그런 관계’인데 ‘자신과는 관련 없는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신경 쓰는 일’의 의미로 쓰이고, 간섭 역시 단지 맞닿아 있거나 섞여 있음을 의미할 것인데 결국 ‘관계없는 남의 일에 부당하게 참견’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현실. 서로 관련이 깊어지면 관련 없는 데까지, 또는 원치 않는 영역까지 간섭하거나 참견하게 되고 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귀결이라는 말인가?
작년 12월호에 성 역할 관련해서, “처음에는 단순한 ‘역할 구분’이었을 뿐인데 역할 구분이 오래 지속되고 반복되다 보면 이내 ‘차이’가 생겨나고, 그 차이가 고정되고 집단화하면 어느새 차이는 ‘차별’로 변질되고 만다.”고 언급한 바 있다. 관계에서도 그와 유사한 경향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처음에는 단순한 섞임과 관계였을 뿐인데 그것이 시간이 지날수록, 또는 관계가 깊어질수록 서로 원치 않는 영역까지 자연스럽게 개입하게 되는 귀결.
실제로 배려가 지나쳐 상관으로, 그러다 종국엔 간섭으로 변질되는 장면은 삶의 곳곳에서 종종 만난다. 오지랖 넓은 나는 더욱 그 경험치가 높다. 사람은 대개 배려 받고 싶어 하지만 그렇다고 간섭에 이를 정도의 지나친 배려까지 받고 싶어 하진 않는다.
배려와 간섭의 경계는 어디이고 차이는 무엇인가?
공간의 경계, 관계의 경계
이렇게 복잡하게 글을 시작한 이유는 앞서 소개한 김대중 대통령의 제안 ‘동거하는 부모 자식 간의 사생활의 자유를 유지하기 위한 가옥구조, 기타 생활방식의 개발’이 바로 이 점과 관련 있어 보여서이다. 효도의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유지 발전을 위한 개선이라 하셨는데, ‘부모 자식 간의 사생활의 자유 유지’라고 하신 부분이 경계의 필요성과 맞물린다. 같이는 살되 공간이 다소 분리되어 생활방식 차이에서 오는 충돌을 최소화하는 그런 경계와 구분을 말씀하신 걸로 이해한다. 퇴직 후 경계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낀다.
흔히 부모 자식 간에는 구분과 경계가 없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경지인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앞서 노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 힘들다 한 고백은 바로 이 경계 없음에서 기인한다. 모시고 살 때, 일의 고단함 따위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60여 년을 모시고 살아왔으니 거기에는 충분히 적응되었다. 그것은 부모를 모신다는 보람을 수반하니 힘든 일이 아니다.
가장 힘든 것은 노모와 나와 내 아내와 우리 아이들까지 가족 구성원 모두가 아파트라는 작은 공간 속에 함께 지내면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일상의 부딪힘이다. 아파트라는 제한되고 폐쇄적인 공간에서는 끊임없이 말과 행동을 통해 관계의 섞임과 상호 간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무슨 거창한 다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평범한 섞임일 뿐이고 다들 서로를 많이 배려하는데도, 그것이 서로에게 간섭으로 작동되는 일이 생기고 거기서 오는 불편함과 문화적, 관계적 충돌이 발생한다. 그래서 2층 단독주택으로 이사해서 공간 분리라도 꾀해 볼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 선택도 다른 현실적 제약이 때문에 그만두었다.
노파심, 제발 저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노파심(老婆心)이란 말이 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늙은 할머니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가 사전에 의하면, ‘지나칠 정도로 남의 일을 걱정하는 마음’, ‘지나치게 걱정하는 마음이나 지나친 염려를 가리키는 말’ 정도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극노인이 되신 어머니의 노파심도 정말 지나치시다. 어머니 흉을 보려고 꺼낸 말이 아니다. 나 자신을 포함하여 이 글을 읽는 수많은 ‘나’의 늙음을 준비하기 위한 제안적 화두로 던지고픈 것이다.
어디 노파뿐이겠는가? 누구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때론 배려라는 명분으로 쉽게 남의 삶에 지나치게 개입하고 간섭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가까운 사람이면 그 유혹은 더 크게 꿈틀댄다. 하지만 노예의식에 쪄든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든지 상관당하고 간섭 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 가족이라도, 아무리 내 자식이라도 그렇게 간섭해서는 안 된다. 간섭은 삶의 자유의지를 제약한다. 노파심을 버리려고 하루에도 수없이 다짐하곤 한다.
나는 아직 경계인이다. 1년 반이 지났지만 아직도 의식은 여전히 교직과 퇴직, 학교와 가정, 사회활동과 집안 살림의 경계선상에 있고,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했다. 행동양식과 의식도 배려와 간섭의 경계 어디쯤에 있는 것 같다.
지금부터라도 그냥 ‘내비두는’ 훈련을 더 해야 한다. 오죽하면 비틀즈도 대표곡에서 후렴으로 “Let it be(내비둬, 냅둬유)”를 하염없이 외쳤겠는가?
제발, 내비두자.
거기서 경계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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