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주희 회원
세상에 인간이 옳다고 세운 말들이 거짓처럼 느껴지곤 한다. 그 까닭은 세상 사람들이 그래서도 세상사가 그렇기 때문도 아니다. 나를 보면 그렇다. 굳이 무언가에 비추어 보지 않아도 나는 수없이 많은 내가 끊임없이 반목에 반목을 거듭하며 살고 있다. 상황 따라 기분 따라 규정되는 것들이 일관성을 잃은 건 물론이거니와 서로 모순되는 것도 허다하다.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스스로 모순되는 것도 옳다고 생각하고 그 외 것들에 배타적인 나를 볼 때다.
올해 제법 큰 학교로 발령을 받아 5학년을 맡았다. 3월 우리반 모습은 이러했다. 수업이 시작해도 책도 펴지 않거나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24명 중 6명. 한 아이는 웃지 않을 뿐 아니라 짜증 난 얼굴로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하다 집에 갔다. 그리고 한 아이는 기분이 나쁘면 욕하고 때리느라 매일 여기저기서 전화가 왔고 결국 경찰에서 학교로 찾아오셨다. 한 아이는 종일 손톱을 뜯느라 공부는 물론이고 친구들과 놀지도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활발히 놀다 수업 시간만 되면 엎드려 자는 아이도 있다. 한 아이는 내가 하는 말마다 삐딱한 꼬리를 달았고 친구들에게 날카로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교과서를 한 권도 가져오지 않는 아이도 있었다. 매시간 아이들과 순조로운 진행보다 계속 부딪치고 멈춰야 하는 일들이 잦았다. 사건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아침이면 무거운 마음으로 출근을 해서 사건 파악부터 해야 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쉽지가 않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고개를 드는 내 안의 내가 있다.
스스로 종종 묻곤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옳고 좋은 방향의 결과를 추구하며 많은 고민과 생각을 하고 살면서 그 결과를 내기 위한 과정에 대한 고민은 얼마나 하고 있는가? 좋은 결과를 위해 나는 일방적인 결정과 제시, 강요 등을 서슴없이 한다는 것이다. 솔직히 내게는 옳은 일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아니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결과는 바람직하게 얻을 수 있겠지만 과정의 소통 없는 일방성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폭력성으로 나의 어느 한 자아는 일그러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얼마 전 우리반 아이가 다른반 아이를 심하게 때렸다. 아이와 대화를 나누는데 첫 마디부터 거짓말이다. 다시 이야기해보자 하는데도 거짓말은 계속 이어졌다. 순간, 나는 앞에 있던 갑티슈를 책상에 내리치며 아이에게 크게 소리를 질렀다. 계속되는 폭력 사건과 거짓말로 힘든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렇게까지 선생님이 했는데 너는 그렇게밖에 못하냐는 서운함과 원망,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화를 낼 수 밖에 없다는 정당성으로 나의 폭력성이 고개를 드는 것이다. 간신히 막고 있던 감정의 둑은 아이의 잘못과 뒤범벅되어 터져 나와 더더더 강도 있고 더더더 끝을 모르게 더더더 스스로를 일그러뜨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꿈틀거리는 무수히 많은 나를 느끼며 살지만 그 중 스스로 만들어 키우는 이 괴물 같은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이 되었다. 정확한 인생의 계산법에서는 너의 잘못은 너의 것이고 그 잘못에 대한 나의 반응은 내 몫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더 이상 너 때문이다 미룰 수 없다. 아이에게 화를 낸 후 많은 생각이 오갔다. 내 머릿속에 포용, 소통, 비폭력 이란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건강한 과정을 거쳐 더 나은 방향의 결과를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마음에 일렁였다.
오늘도 우리반은 여러 일이 있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나은 한걸음을 제대로 걷는 일에 마음을 모아 본다. 그러면서 나는 스스로 일그러뜨린 것도 차츰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도 가져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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