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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숨을 민족 제단에’ – 흰돌 강희남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국군 장병들과 호국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된 법정 기념일을 현충일이라고 하는 것 익히 알고 계시겠지요. 1956년부터 6월 6일을 지정해서 기념하고 있는 것인데, 어릴 적엔 달력에 ‘빨간 날’이어서 하루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좋기는 했지만 아침 먹고 한참 친구들하고 놀다 보면 싸이렌이 울려서 1분 동안은 꼼짝없이 반듯이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어야 했습니다. 1분이 왜 그렇게도 길게 느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 언제부터인가 현충일은 국군 장병들과 호국 영령들 뿐만 아니라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하면서 목숨을 바친 열사들도 기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중의 한 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2009년 6월 6일 ‘이 목숨을 민족 제단에’라는 제목으로 마지막 남기는 말을 남시기고 장엄하게 순절(殉節)하신 이 시대의 큰 어른이셨던 흰돌 강희남 목사(1920~2009). 그분은 오래 전부터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이 자기 집을 위해서는 땀을 흘리는 법이요, 세상을 위해서는 눈물을 흘리는 법이요, 조국을 위해서는 피를 흘리는 법인데..... 나는 아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바늘 끝만큼도 도움이 되지 못한 채 이 지경(감옥)에 이르렀습니다.” (1996년 12월 지인에게 보낸 옥중 편지 중에서) 강목사님의 민중을 위한,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을 위한 강직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씀이 아닌가 합니다. 


  말을 바꾸어 ‘범민련(조국 통일 범민족 연합)’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2007년 10월 4일 발표한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10.4 선언>,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에서 합의 채택한 역사적인 <한반도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도 실은 자주 평화통일, 민족 대단결의 조국 통일 3대 원칙에 기초한 ‘범민련’ 정신을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범민련 남측 본부 의장이 강희남 목사이셨는데 아직까지 ‘범민련’이 이적단체로 찍혀있다는 것도 함께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흰돌 강희남 목사 12주기(6월 6일)을 앞두고 기념사업회에서 목사님에 대한 평전을 찍어냈습니다. 이름하여 ‘민족 민중의 목자’, ‘무소유와 산제사의 삶을 산 통일청년 흰돌 강희남 평전’(홍성표 지음). 책이 나왔다는 것을 알려드리면서 목사님의 마지막 고별사 <8천만 동포에게 드리는 글> 전문을 옮겨 적습니다. 정신 번쩍 들게 하는 그야말로 대쪽같은 말씀입니다. 

 

 

  더는 그만두고 왜놈들이 강제로 1905년(을사)륵약 때만 해도 민영환, 송병선 등 애국지사 10여 명이 순절했는데 그중에도 민영환 선생을 모시던 인력거꾼이 뒤를 따라 자살했고 송병선 선생 댁 소녀 식모 공림이 식도로 목 찔러 죽었다. 송병선 선생은 “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의(義)조차 망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을 남기셨는데 그 말씀이 항상 식민지 백성 된 내 가슴에 사무쳤던 것이다.

  돌아보건대 1945년 종전 공간에서 양키 제국주의자들이 제 맘대로 38선을 그어 소련 측의 동의를 얻어 국토를 량단해 놓고 마땅히 전승국 대우를 받아야 할 이 땅에 점령군으로 들어와 중앙청의 일장기를 내리고 저들의 성조기를 세웠으니 이는 이 땅의 주인이 자기들이라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들은 군정에서, 북의 소련군과는 정반대로 친일파를 대거 등용함과 동시에 상해 림정 등 민족주의 세력들은 완전 배제해 버림으로 이 땅의 역사를 개판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송진우, 여운형 등 애국지사들을 차례로 제거해 버리고 저들의 똘만이 리승만을 세운 뒤 소위 비밀주권을 움켜쥐어 오늘날까지 무불간섭이요 무불착취다. 포츠담 선언에 의해 1948년 북에서 소련군이 철수하자 양키군들도 1949년 7월에 일단 철수했으나 저들은 곧 이를 후회해서 이 땅에 재상륙을 위해서는 전쟁이 필요함으로 Achison Line을 설정하여 일본까지만 자기들 방위선에 두어 지키고 한반도는 방위선 밖에 버려 설정하여 관련하지 않겠다는 뜻을 북측에 보여줌으로 북을 유인하여 한국전쟁을 일으켜 이 땅을 재점령한 뒤에 전쟁을 끝내고 북에서는 중공군이 완전 철수했으나 저들의 군대는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있으면서 이 땅 식민지화에 200%쯤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다.
  또 방위동맹의 차원에서 우리 령토, 령해, 령공 할 것 없이 완전히 자기들 임의에 맡겨왔으니 이것으로 보아도 방위동맹은 허울 뿐이고 완전히 례속동맹인 것이다.
  력사와 민족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찌 분노하고 통탄하지 않겠는가? 실로 해 저문 날 따오기 소리에 한숨짓고 북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울움에 눈물짓던 세월이 얼마이던가? 외세 척결과 민족 통일을 바라 쓸모없이 늙은 이 한 마리 학은 목이 길어서 더욱 서럽다.

  통일운동은 바로 양키 추방 운동과 직결된다는 신념으로 오랫동안 싸워본다고 했지만 이 땅의 괴뢰 정권과 보수주의 매국노들의 세상에서 이란격석(以卵擊石)이 아니던가? 이 치욕스러운 력사를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옛 어른들은 “가이생어생(可以生箊生)이요 가이사어사(可以死箊死)라 가히 살 만한 때에 살고 죽을 만한 때에 죽으라”가르치지 않으셨던가?
  나는 민족적으로 못하면 개인적으로라도 그들에 대한 노예 신분 청산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몰려 있음을 어이하랴? 내가 대전 감옥에 있을 때 꿈에 대마도에서 절식으로 운명하신 최익현 선생을 뵈었는데 내가 선생을 부액해 모시고 가면서 춘추를 들으니 73세란다. 그렇다면 나는 선생보다 17년을 덤으로 살았으니 이것도 하나의 죄의식으로 남는다.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 오자서가 목숨을 피해 오나라 망명길에 오르면서 핏덩이 같은 어린 왕손 승을 안고 그 천신만고 구사일생의 길을 간 것은 오직 그 어린애만이 장차 초나라 왕통을 이을 존재라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나 자신도 그동안 기막히게 고독하고 서러운 운동의 세월을 살았고 이제 또한 오자서처럼 양키 추방과 련방제 통일만이 이 민족의 살길이라는 신념 하나를 멍든 가슴에 안고 내 집을 양키 대사관 앞이라 여겨 입 대신 몸으로 말하려고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이 길을 가는 것이다. 조국과 민족 앞에 한없이 부끄러운 목숨으로 말이다.

  단기 4342년(2009년) 5월 1일

 


†서용운 목사는 전북대학교와 한신대학원을 졸업하고, 전주 임마누엘 교회 담임목사로 있으며, 흰돌 강희남 목사 기념사업회 일도 거들고 있다. metase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