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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학교가 문제야

| 서용운 (회원)

 

 

학폭의 기억

 

봄이 되었나봅니다. 여기저기 소리없이 꽃망울이 터지고 있습니다. 뒷산에 올라 걷다 보니 매화꽃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그 아래 잠시 앉아있는 것 만으로도 저 혼자 봄을 다 가진 것 같이 좋았습니다.

 

이 찬란한 봄날에 여기저기 학폭(학교폭력)’에 대한 공방이 터지고 있습니다. 연예계나 스포츠계에서 더 소란한 것 같아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까까머리에 검은 색 교복 입고 학교에 다녔던 제 또래에게는 별로 낯선 일이 아닐 것인데, 어느 모임에서 들어보니까 주로 선생님들에게 당했거나 혹은 혼났던 기억들이 많은 것 같았습니다.

제 이야기를 좀 풀어볼까 합니다.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 저는 70년대 전주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1학년 5월쯤 되었을까, 하루는 선생님이 오전 수업만 하고 오후에는 평화동 어디에서 보리베기를 해야한다고 모이라고 했지요. 그 때는 보리베기 뿐만 아니라 겨울에 보리 밟는 것도 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베기에서 빠졌습니다. 이유는 제가 잘못 들은 것이지요. 하고 싶은 사람만 와도 된다라고 들었던 것이지요. 저는 그래서 가지 않았는데, 그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보니 도망자가 되어서 칠판에 제 이름이 쓰여있었습니다. 몇 명 더 함께 도망자가 된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도망자들은 앞으로 불려 나와서 대나무 뿌리로 만든 회초리로 손바닥 꽤나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도망자들의 이름이 선생님의 교무수첩 맨 끝에 따로 올려졌는데 이름하여 문제아였습니다. 제가 수첩에 올랐는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어느 날 조회 시간에 무슨 일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또 앞으로 불려나가서 된통 야단을 맞았는데 그러면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내가 이렇게 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각 반마다 5명씩 문제아를 지정해서 집중적으로 지도하라고 해서 이러는 거야, 임마!” 체구는 크지 않지만 앞이마가 훤히 벗겨지고 유난히 땀을 많이 흘리시던 음악을 가르치셨던 고선생님이셨습니다. 유도를 하셨다고 2단인가 3단인가 된다고 하면서 화가 나면 아이들을 사정없이 업어치기를 하셨는데 그래도 크게 다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업어치는 기술 뿐만 아니라 다치지 않게 하는 기술도 있었을 것이지요. 또한 많은 아이들 앞에서 한두 명 업어치면 반 아이들을 휘어잡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셨겠지요. 저도 여러 번 엎어치기 당했던 문제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왜 저는 그 선생님이 3년 동안이나 담임을 하셨는지 모르겠어요. 3년 동안 문제아라는 딱지를 달고 살게 되었는지 하는 것이지요. 그 당시 한 반에 50명이 넘었던 때였지요.

 

 

 

음악실의 추억

 

문제아로 낙인 찍히고, 업어치기를 당하고 대나무 뿌리 회초리로 맞으면서도 제가 그 선생님을 크게 원망하지 않은 데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그 때 음악 교실이 따로 있어서 거기서 수업을 했던 적이 있었는데, 저는 선생님이 LP판으로 틀어주시는 클래식 음악이 정말 좋았거든요. 음악이 좋은 것 뿐만 아니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시면서 열정적으로 곡을 설명해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간이 없응게 맛만 조금 보너라, 알겠냐, ?”

저는 그 모습이 정말 멋져 보이고 이게 원래 선생님의 모습이구나라고 혼자 생각하면서 음악을 들었습니다. 봄에 시냇물 흐르듯이 잔잔하게 흐르는 베토벤의 전원교향곡, 화장실 급해 죽겠으니 문 좀 빨리 열어달라고 숨 막히게 대문을 주먹으로 치는 것 같은 운명교향곡을 거기서 처음 들었습니다. 저런 음악들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그런 음악들이 얼마나 좋았는가 하면 십수 년 후에 서울에서 대학원 공부할 때였습니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 공연이 세종 문화회관에서 있었는데 연주곡목이 전원운명이었습니다. 공연 소식에 얼마나 마음이 설레이든지 없는 돈을 꾸어가지고 주최했던 동아일보 사옥에 가서 티켓을 예매했었지요. 물론 2장이지요. 지금의 제 아내와 함께 그 음악회에 함께 했지요. 그 때의 감동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그 때 티켓 2, 공연 팸플릿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거의 40년 가까운 옛날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면 그 음악 교실의 추억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지요.

 

 

그 후로도 오랫동안

 

문제아 3년 중학교 때 이야기입니다만, 그 후로도 늘 제 머릿속에서 자리잡고 있었으니 그 딱지의 여운이 참 오래가는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 그 후로도 늘 중심이라기보다 주변에 머물러 지내온 것 같고 한 번도 누구에게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혹은 받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삶을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스승의 날이 되면 생각나는 그래서 찾아 뵙고 싶은 선생님이 한 분도 저에게는 없으니 돌이켜보면 섭섭한 일이지요. 때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내가 꼭 중심이거나 주목을 받으며 살아야 할 이유도 별로 없는 것 아닌가?

문제아로 3년을 살면서 학교라는 제도의 역기능을 실감했지요. 그리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는 학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문제아가 아니라 문제 학교라는 생각 말입니다. 한 학급에 50명이 넘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3년 동안 한 선생님에게 찍혀서 산다는 것이 말이 되냐고요. 역기능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선생님이나 학생들이나 모두 힘들고 어려운 교실이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문제아로 3년을 지나면서 건진 것도 있었는데 문제의식(問題意識)’이라고나 할까요. 왜 그렇까? 어떻게 해야 하지? 조금 더 생각해보고,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는 힘이 길러졌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이 지나고 보니 나를 키웠던 교실 밖 선생님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 보따리 하나 풀어보았습니다.

 

 

 

* 서용운 목사는 전북대학교와 한신대학원을 졸업하고, 전주 임마누엘 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metaset@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