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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 회원기고

[회원의 글] 2021년 1월 22일 금요일 (교단일기 #39)

| 이주희 (회원)

 

 

 

안개가 자욱한 아침. 1월이지만 내리는 비는 포근하고 나무는 곧 깨어날 것만 같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발걸음으로 아이들이 있는 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모든 것들이 나와 가까이에 있는 것만 같고 나를 사랑해주는 것만 같다. 전교생이 50여 명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학교. 운동장 만큼은 널따랗고 운동장이 가진 파란 하늘은 더 넓은 그리고 멀리 듬직한 산이 학교 한가득 보이는 곳. 이곳에서 나는 3년을 보내며 온전한 계절의 모든 것을, 봄과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조금도 놓치거나 잃지 않고 지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착하고 순한 사람들과 그 모든 계절 동안 함께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5학년 그리고 6학년, 2년 동안 함께 했던 나의 아이들.

규혁, 찬미, 한빈, 서정, 요셉, 준효, 나경, 가령, 태민, 자인.

이 아이들과 함께 쓰여진 나날의 일기들은 그 어느 것 하나 뜨겁지 않았던 것이 없다. 싸움을 해도 사고를 쳐도 크게, 눈물을 흘려도 펑펑, 웃는 것도 깔깔깔 정도가 아니라 배를 잡고 데굴데굴 구를 정도였고 함께 나눈 감동도 대단했다. 이만큼이나 뜨거웠던 아이들에게 있던 문제 또한 내가 받아들이기에 벅찼다. 처음 만난 큰 문제들, 끊이지 않은 아이들의 갈등 속에서 나는 어렵고 힘들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이들과 많은 문제를 건너오면서 경력이 더해질수록 커지던 교실 안 문제에 대한 부담과 스트레스가 잦아들게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문제들이 누구의 삶에나 녹아있는 자연스러운 삶의 조각으로 받아들여지게 되고, 문제 종결을 위한 해결보다 그 속에 있는 사람이 먼저 보고 싶어지기 시작했다.

 

 

2년 동안 이 아이들과 함께 다닌 길들도 빠뜨릴 수 없다. 우리는 학교 인근에 있는 전주천 길을 모든 계절마다 꼬박꼬박 걸었다. 여러 차례 올라간 중바위 전망대와 완산칠봉. 통영으로 부산으로 서울로 곳곳을 누비며 함께 다녔던 시간. 땀에 흠뻑 젖어 올라간 강천산을 내려와 다같이 물속에 풍덩 빠진 일. 세상 곳곳으로 뻗어있는 우리가 함께 걸었던 길들을 떠올릴 때면 내 마음은 번져오는 기쁨으로 가득해지고 그 무엇으로도 꺼뜨릴 수 없는 충만함이 생겨난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솔직했던 이 아이들과 많은 것을 함께 하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스스로를 묶어 오던 책임과 의무, 그리고 체면에서 풀려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누구에게나 흡족하게 완성된 무언가를 보여주려는 생각 대신 부족하면 부족 한대로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다시 해 보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실수와 잘못으로 성숙하지 못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거라는 두려움과 그 이면에 인정의 욕구까지 더해지면서 나는 점점 어떤 일이든 즐겁게 해나가지 못하고 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이 아이들이 가르쳐준 자신을 속이지 않는 솔직함, 타인의 시선과 평가로부터의 자유로움, 해나가는 과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밟아가며 느끼는 즐거움, 부족함을 이야기할 때 부끄럽지 않은 마음,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들어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하거나 비난하지 않으려는 노력. 이 덕분에 나에게 부족함에 대한 공감이 찾아 들어오고 작은 연민과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부족함을 덮어주고 싶다는 기도를 하게 했다.

 

 

아이들의 건강함과 즐거움이 나의 건강함과 즐거움으로 옮아와서 나는 아이들의 말에 메아리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나에게 준 사랑에 착하고 순해졌다. 스스럼없이 나를 자신들의 맑은 하늘 같고 쨍하게 깨끗한 세상으로 불러주어 나는 그 전의 나보다 더 많이 웃고, 더 가볍고 간결하여졌다. 그리고 더 많은 눈물도 갖게 되었다.

 

 

 

이런 선생님, 저런 선생님이 되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쓰고 지워왔다. 이곳은 나에게 어떤 선생님이 되어야겠다는 생각 대신 아이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했다. 그런데 오늘 1학년 우리반 아이가 준 편지에 선생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예요.’라고 적혀 있어 눈물이 왈칵 나고 말았다. 나 혼자 품고 있던 말이 아이의 말로 세상에 나온 순간, 생명력 있게 살아나는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길은 아직 모르지만, 아이들 덕분에 달라진 내 마음에 그 말은 오래도록 숨 쉬며 살 거라는 걸 나는 안다.

 

 

 

 

* 이주희 님은 아이들과 함께 인생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둘씩 배워나가며 '아이들이 제 인생의 선생님'이라고 말하는 초등학교 교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