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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글] 관료주의와의 전쟁 (2019.04월)


글 | 이선 회원



독일 유학생들의 경험담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깃거리 중 하나는 행정공무원과의 갈등이다. 유학생들은 주기적으로 비자를 연장시켜야만 하는데 비자 담당공무원들이 여간 깐깐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도 비자를 연장하러 갔다가 서류가 미비하여 여러 번 다시 찾아간 적도 있었고 사진이 흐릿하다고 해서 다시 찍어서 제출한 적도 있었다.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외국인 비자 연장을 담당하는 그 건물 안에는 사진자판기가 있었다. 이곳에서 사진을 다시 찍어오라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래서인지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서 한국 성씨의 알파벳 첫 글자인 K, L, P를 담당하는 공무원에 대한 정보는 아주 중요했다.


이런 경험만 보더라도 독일은 관료주의 사회임이 틀림없었다. 독일 사회에 독재자나 자본가의 횡포는 없지만 관료들의 갑질은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독일의 철학자 하버마스의 철학책을 읽다보면 관료주의에 대한 비판이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하버마스는 행정공무원들의 관료주의가 생활세계의 일상적인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관료주의란 부패나 공권력 남용이 아니라 매뉴얼대로 행정을 처리하는 형식적인 행정 운영 방식을 의미한다. 독일 사회에서는 공무원의 부패나 공권력 남용을 철저하게 가려내고 처벌하고 있다. 공공성은 살아있지만 공권력 집행 과정에서 발생하는 공권력의 폐해는 아직 남아있는 것이다. 공무원들은 그저 자신의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민들의 실질적인 삶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형식적으로 공권력을 집행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시민들의 삶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공권력을 집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앞서 이야기한 외국인 비자 담당 공무원들도 지극히 원칙적이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일을 처리하지만 매뉴얼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그들의 편협함은 독일 사회의 약자들인 외국인들에게는 상당히 위압적이다. 이들이 판단하는 ‘비자 연장 불가’는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부터의 퇴출을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친절한 공무원들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에게 일을 가져오는 사람들을 아주 귀찮아하고 싫어하는 눈치였다. 나는 불친절하고 꽉 막힌 담당공무원들을 만나고 나면 그 스트레스 때문에 한동안 독일 사회 전반에 대해 상당히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세어보면 고작 몇 번의 갈등이었지만 독일 행정공무원들에 대한 불신은 사리지지 않았다.  


그런데 재작년(2017년) 독일에 다녀오고 나서는 독일 관료주의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독일 관료주의가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당시 독일연방 교육연구부가 아동청소년을 위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문화는 강하게 만든다’는 프로젝트의 담당 행정관인 모니카 부에르베니히(monika buervenich)를 만나 인터뷰를 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모니카는 이제까지 내가 만났던 독일의 행정공무원들과는 다르게 자기가 하는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인터뷰 내내 그녀는 왜 자신의 일을 중요하고 왜 필요한지를 힘주어 설명했다. 여느 공무원 같지 않고 신나게 일하고 있는 참여연대의 활동가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또한 일하는 방식이 편협하지 않고 당면과제에 대해 상당히 창의적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녀에 따르면 ‘문화는 강하게 만든다’라는 프로젝트는 이제까지 독일 연방 정부에서 추진한 적이 없던 방식이었다. 독일의 문화와 교육은 본래 주정부의 소관이기 때문에 연방 정부의 교육연구부는 교사임용고사 등의 아주 협소한 일만을 담당했다. 그런데 독일의 학력 수준이 심각하게 낮다는 통계가 피사(PISA,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 의해 도출되자 연방정부의 교육연구부는 아동청소년의 교육 수준을 올리기 위해 이제까지 연방정부가 전혀 관여하지 않았던 아동청소년 교육에 대한 대책을 우회적인 방식으로 마련하게 된다. 다시 말해 주정부 소관인 학교 교육을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대신, 학교 밖에서 박물관, 문화센터, 다양한 예술가 협회 등을 중심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교육 프로젝트를 제안한 것이다. 오랜 기간의 협의를 통해 기존 예술기관과 단체들을 설득하고 학교를 비롯한 공공기관과 민간기업, 예술가들(및 단체)을 엮는 삼각 구조를 고안했다. 이러한 다각적인 협력구조를 고안한 이유는 이 프로젝트가 자연스럽게 지역사회 안에 자리 잡고 지속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모니카는 설명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이다. 사실 그녀가 기획하고 수행하고 있는 ‘문화는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 프로젝트지 2013년에서 2017년까지 2억 3천만 유로(약 3,000억 원)를 지원했고 인터뷰를 했던 2017년 10월 당시 2018에서 2022년까지 2억 5천만 유로(약 3,250억 원)의 지원이 확정된 어마어마한 액수의 사업이다. 모니카는 이 어마어마한 액수의 프로젝트가 아이들이 약속시간을 지키도록 교육하는 것이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프로 예술인들을 오랫동안 설득하여 참여시키고 이들을 통해 연극, 서커스, 글쓰기 등의 교육을 하도록 하는 프로젝트의 목적이 아이들을 약속 지키는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서란다. 모니카는 나의 놀란 표정을 읽었는지 약속을 지키는 것은 사회성의 근간이라며 우리가 교육시키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능력이라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나는 이 인터뷰를 통해 독일의 행정 집행이 많은 것을 고려하고 가장 기본적인 가치와 방식에 근간하면서도 상당히 창의적이고 유연하게 그리고 지속가능성을 고려하면서 실행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이전의 유학 생활에서 겪었던 말단 행정 공무원들의 관료주의가 단숨에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행정이 중심이 되어 관료주의적이고 형식적인 매뉴얼들을 현실에 맞게 다시 새롭게 만들고 그 편협한 방식들이 최대한 유연하고 실질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모습은 희망적이었다.


우리 사회가 국가권력의 전체주의적 억압과 폭력의 잔재에서 벗어나 공무원들의 부패와 비리를 없애기 위한 싸움을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 싸움이 끝나고 난후라야 아마도 우리 사회는 본격적으로 관료주의와의 싸움에 돌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싸움들을 위해서 우리 모두는 시민활동가가 되어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