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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글모음/› 회원기고

나의 삶 이야기1.

참여연대 회원통신 복간을 하면서 나에게 부탁한 원고 제목이 나의 삶 이야기. 이런 부탁을 받고 잠시나마 내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 보니 남에게 드러낼 만큼 잘 살아 온 것 같지도 않고 크게 내세울 만큼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도 아닌데 왜 이런 주제의 글을 나에게 부탁했을까? 아마도 내가 직장 생활하면서 집은 전주이면서도 늘 직장은 타지 발령으로 전국을 떠돌다 이제사 정년을 앞두고 공로연수라는 이름으로 고향으로 돌아오니 그동안 어찌 살았는지 우리 회원님들에게 보고인사 드리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다.

 

생각해 보면 직장생활 내내 참 많이도 떠 돌았다. 보령, 진천, 제주, 군산, 울산, 목포, 광주, 서울에서는 몇 번씩 근무했다. 타지에서 직장다니다 주말에 어쩌다 한번 지역에서 선후배들을 만나면 늘 물어 보는 질문이 너 요즘 어디에서 근무하냐?’는 것이었다 그럴만도 했다 어쩌다 한번씩 만나면 나는 늘 다른곳에 근무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질문의 대답 끝에 반응은 간혹 타지에서 얼마나 힘드냐!’는 격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집 떠나 혼자 사니 얼마 좋냐!’ ‘주말부부는 삼대가 덕을 쌓아야 가능한 일이다’. ‘너 그러고 떨어져 사니까 이혼 안 당하고 지금까지 사는 것이다’. ‘인생이 이벤트다’. 등 부러워 하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그런 반응을 부정할 생각은 별로 없었다. 근무지가 멀다보니 일요일 저녁이나 월요일 새벽에 장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불편함은 좀 있어도 그 외에는 생활상의 어려움은 크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도 나에게 숨겨진 역마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과장 승진해서 간 최초 타지 근무지인 보령과 차장 승진해서 발령받은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주로 내가 원해서 근무한 본사 근무여서 그랬는지도 모르겠.

 

대부분의 공조직이 다들 비슷하겠지 만 내가 근무한 근로복지공단은 특히 본사에서 근무해야 만 승진기회가 많이 얻을수 있었다. 그래서 과장 때는 본부 감사실, 차장 시절에는 총무부, 부장 때는 복지계획부에서 근무하면서 남들보다 늦지 않게 승진기회를 얻었으니 집 떠나 살면서 치른 불편함 못지 않는 댓가가 있었기에 큰 어려움으로 느끼지 못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금 그 긴 세월을 복기해 보면 어찌 견뎌 냈는지 아득하기 만 하다.

 

나의 직장생활의 시작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북지부 간사였다. 2년 근무했나 싶다. 4학년 2학기에 학생운동으로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집행유예로 출소 후 바로 군대에 강제징집되어 강원도 화천에 있는 이기자부대에서 고된 군생활을 마쳤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군 복무중에 육군고등법원에서 군사재판까지 받았던 파란만장했던 군생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군 제대후 복학하여 남은 한학기 겨우 마치고 근근히 졸업이라는 것을 했다. 졸업할 당시 교사들이 참교육을 실현하겠다고 노동조합을 만들다가 전북에서도 67명의 교사가 해직되었다. 이분들이 모여 시외버스터미널 맞은편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하고 있었다. 그 해직교사 한분이 나에게 찾아와 전교조 일을 같이 하자고 제안하였고 이를 흔쾌히 수락하여 나의 첫 직장이 전교조 사무실이 되었다. 당시 활동을 같이하자고 제안했던 선배가 이미영선생님이다.

 

물론 일반 직장인처럼 월급을 받기 위한 직장생활은 아니었다. 비롯 간사 역할 이긴했지만 명색이 사범대를 나와 참된 교사가 꿈이었던 사람으로 이 땅의 교육 생태계를 바로 잡기 위한 선생님들의 치열한 교육운동에 미력이나 힘을 보태는 일이었기에 비록 경제적으로는 궁핍했어도 교육을 향한 신념과 열정으로 뭉친 선생니들과의 활동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특히 첫직장인 전교조는 또 다르게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다. 타지로 떠돌며 남편과 아버지 역할을 제대로 못해도 늘 지지해 주고 지금도 버리지 않고 챙겨 살아주고 있는 아내를 만났기 때문이다. 아내는 나 보다 앞서 전교조 간사를 했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의 만남을 간사한 놈과 간사한 년의 만남이다라고 농을 하기도 한다.

 

연예시절 전교조사무실 앞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하다가 우연히 김영기, 박창수 선배를 조우했는데 우리의 연예를 도와주겠다며 온갖 짖굳은 장난을 시키고 나서 지금도 본인들이 우리 결혼의 주역이라고 주변에 이야기 한다. 물론 다 동의는 못해도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선배님들의 덕 또한 부인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 부부의 인연을 맺어 준 것은 전교조다. 그런 전교조가 더욱 난맥으로 얽혀 만 가는 우리나라의 교육을 바로 잡는 조직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글 배선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