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일기 #47
글 | 이주희 회원
나도 모르게 출발 된 삶이 이제 중간지점을 넘어섰다. ‘젊다’라는 말이 공식적이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20살 이상 차이 나는 동료가 있고, 나는 제법 지긋한 선배 교사가 되었다. 내 나이가 낯설고 겁이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잇값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더 많이 살아온 것에 대한 무언가 의무와 책임 같은 것을 느낀다. 그런 묵직한 부름에 나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자주 느끼는 감정은 치졸함이다.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일상을 기록하면 볼만할 거다. 지극히 사소한 것들로 매시간이 채워지고 그 속에서 나도 자잘 자잘해진다. 열 살 아이들과 티격태격도 하고 아이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인 줄 알면서도 괘씸해하다 싫은 소리 한마디 얹기도 한다. 교실 안 선생은 없고 아이들만 있는 것 같다. 어른인데도 속 좁게 구는 나. 그래서 일부러 삐뚤어지고 차가워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저절로 넓어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들을 더 많이 갖게 되고 더 방어적으로 벽을 쌓고 좁은 생각과 마음으로 은둔하게 되는 것 같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았던 날들. 꿈을 꾸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이젠 내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난다. 부모님의 일이 그렇고 자녀의 일이 그렇다. 건강 문제, 경제적 문제 등 산적한 현실들은 계속된다. 살아가며 만나는 즐거움보다 힘겨움이 많아지면서 마음의 여유는 바닥이 나고 삶의 균형은 쉽게 무너졌다. 주머니 속을 아무리 뒤져도 희망이라는 말을 찾을 수 없는 나를 발견할 때면 눈물이 났다. 깔깔거림, 설렘, 신남, 쓸데없지만 재미난 생각, 놀아도 또 놀고 싶은 마음, 자꾸만 장난을 치고 싶은 마음과 무모한 결정 등.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얼어 붙어버린 것들을 떠올려본다.
눈이 내렸다. 솔직히 너무 추워서 나가기 싫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눈이 이렇게나 내렸는데 아이들이 교실에 있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아이들과 우르르 운동장에 나가 한가득 내린 눈을 뭉치고 으쌰으쌰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을 모아오는 아이, 굴리는 아이, 눈사람을 두드려가며 단단히 만드는 아이. 상의하지 않아도 알아서 제 할 일을 찾고 열심히 들이다. 여기저기서 “선생님 도와주세요.”를 하는 바람에 눈사람 만들기 전문가가 되어 나도 한참을 바빴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아이들을 위해 나간 운동장에서 제일 신난 사람이 바로 나라는 걸. 어릴 때 눈이 내리면 이른 아침부터 아무도 밟지 않은 눈에 발자국을 내고 혼자 땀나도록 눈사람을 만들었다. 사실 나는 눈을 좋아해서 눈만 보면 아무리 추워도 가만히 있지 못하던 아이였던 것이다. 그 아이가 나를 흔들어 깨운다. 체한 것처럼 멈춘 삶이 조금씩 움직인다.
나이 듦의 미덕이라 생각했던 포용과 큰일에도 흔들림 없는 굳센 마음. 그런 어른이 되는 일은 그른 것 같다. 나란 사람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치졸한 감정을 느끼고 쩨쩨하게 굴면서 나 스스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정도. 그러고는 다시금 마음을 고쳐먹고 좁아진 마음을 다독이는 정도. 나를 흔들고 짓누르는 일들에 부대낄 대로 부대끼다 겨우겨우 받아들이는 정도. 그러고는 생기는 잠깐의 틈으로 나란 사람에게 부여된 순수를 불러내 숨을 불어넣을 정도. 나잇값에 대한 묵직한 부름에 내가 할 수 있는 솔직한 대답은 이것뿐이다. 어쩌면, 내가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걸 더 알게 될 때 세상의 보잘것없고 연약한 것들을 연민하고 위로할 수 있는 작은 마음들을 주실 지도 모른다. 그럼 지금보다는 더 나잇값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다 눈사람 사진 보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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