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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탐방] 동네 변호사 김석곤

 

 

 

자본은 점차 대형화되어 가고 그에 따라 건물의 규모도 커가고 있다. ‘큰 것들 끼리 모이면서 빌딩 숲과 단지를 이루고, 그 안에서 모든 게 이뤄진다. 없는 게 없다. 사람 냄새만 빼고. 물론 개인적 사심이다. 나는 넓은 도심길보다는 동네 골목길을 좋아한다. ‘동네에 담긴 감정, 냄새, 색깔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사람 냄새가 아닐는지. 이번 가을호 회원탐방은 사람 냄새나는 그곳, ‘사람의 숲법률사무소를 찾았다. 삼천동 동네 변호사 김석곤 회원이다.

 

 

권리의 균형잡기

회원탐방을 하기 위해 만나는 회원 중 열에 아홉은 똑같은 멘트로 말문을 연다. 김석곤 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 하필 저를, 전 너무 평범한 사람인데.....”

참여자치전북시민연대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평범한 다수가 세상을 바꾸어 나갔던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다. ‘평범함앞에 더 이상 무슨 자격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의 이력이 남다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선택한 공부는 정치외교학. 그리고 그의 첫 직업은 기자, 4년도 채 되지 않아 사표를 던졌다. “기자 생활하면서 많이 힘들었어요. 사회의 목탁 역할을 하고 싶어서 기자가 됐는데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많이 고민했죠. 조직의 문제인가, 사람의 문제인가.” 소위 쪽팔리는기자는 되고 싶지 않았다. 일단 계획도 없이 신문사를 그만뒀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 그의 아내의 권유로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했다. “돈 대주는 사람이 공부하라고 하니까 믿고 사법시험 공부를 했죠.(웃음) 법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저하고 잘 맞는 거예요. 무엇보다 민법적으로 사고하는 방식이 적성에 맞더라고요. 민사적으로는 어느 한쪽도 기울어지지 않고 균형을 맞추는 게 중요하고, 그래야 문제를 풀어갈 수 있잖아요.”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검사가 아닌 변호사를 선택하게 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그의 첫 변호사 생활은 정읍에서 시작했다. “정읍에 있던 선배변호사가 판사로 임관되면서 제가 사무실 후임으로 들어가게 됐어요. 그 사무실에서 4년 있다가 지인과 공동사무실을 개업하고 4년을 정읍에서 있었죠.” 그가 살아가면서 혹은 사람 간의 관계 속에서 유독 불편해하는 부분이 있다. “사무장이 민원인들과 상담하면서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는 모습이 너무 불편하더라고요. 저랑 색깔이 맞지 않았어요. 그러던 중에 이런저런 일을 겪으면서 전주로 오게 됐지요.”

 

 

전주로 오게 되면서 법조 단지가 형성된 법원 근처가 아닌 동네에 사무실을 개업 했다. 학연 지연의 관계 속에 있으면 어느 정도 사건을 풀어가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유유상종하다 보면 정작 들어야 할 소리를 못 듣는다. 그리하여 삼천동에 자리 잡았다.

 

 

사람의 숲

2년 전인가, 전주종합경기장 개발 관련해서 법률자문을 받고자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는 보지 못했던 사람의 숲이라고 적혀 있는 그의 사무실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사람들에게 변호사 사무실이란 공간이 소통의 공간이 됐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사람의 숲이라고 지었죠.” 숲에는 다양한 생명체가 모여 있다. 웅장한 나무, 외소한 나무, 화려한 꽃, 수수하고 소박한 꽃, 각양각색의 생명체가 어우러져 있다, 그 속에 질서가 있고, 각자의 삶에 집중해서 살아가고 있다. 숲은 그러한 생명체들을 품고 있다.

 

 

개업 초장기에 그의 사무실은 삼천주민 별별다방을 열고 주민상담센터역할을 했다. 동네 주민들의 각종 법률상담부터 소비자 피해구제상담, 일상생활 세금상담, 노동문제, 부모자녀 관계상담 등 말 그대로 별별 것 다 물어보는 방이었다. “세상 살면서 만나는 고민과 문제를 한 달에 한 번씩 전문가들이 모여서 무료상담을 했죠. 사랑방처럼 운영했어요. 그런데 민원인들이 생각보다 많이 오시지 않더라고요. 삼천동이 오지마을이 아니다 보니... 알아서들 법률 서비스를 받으시더라고요.” 지금은 유명무실해졌다면서 겸연쩍은 듯 미소 짓는 그의 모습에 위로를 보낸답시고 던진 말, 요즘은 정보가 워낙 많아서 그런지 나홀로 소송의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는 등 인공지능변호사가 정식 변호사로 등록되어 파산 사건을 맡았다는 등 나의 역대급 주접에는 브레이크가 없었다. 얼씨구, ‘변호사가 앞으로 없어질 직업 중 하나라고 하더라는 말로 주접의 종지부를 찍는다. 가관이다. 이런 주접을 녹취 풀면서 확인했다니.

 

 

주접을 각설하고, 동네 법률사무소 특성상 겪게 되는 상담 사례를 물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임대차 관련해서 오전에는 임차인이 상담하러 오고, 오후에는 같은 건물에 임대인이 상담하러 오더라고요.” 그런 경우 어떻게 상담하세요? “모르는 척하고 상담해야죠. 하하.”

 

 

직원 한 분과 법률사무소를 운영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아직은 할만해요.” 할만하다는 건 사건 수임이 많지 않다는 뜻인가요? 하하하. 한 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와 가까워진 느낌이다. 여유 있는 농담도 주고받는다. 내가 회원탐방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사건 수임이 많지 않을 수도 있고, 제가 적절하게 조절을 잘해서 할만할 수도 있고요. 하하.”

 

 

괜찮다고 하지만, 사무실 운영에 고민이 왜 없겠는가. 전주 소재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들은 법원 근처에 90%가 있고, 그 나머지가 신시가지에 있다. 그리고 유일하게 그의 사무실이 원도심인 삼천동에 있다. 법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대부분 법조단지를 찾는다는 의미다. 정읍에서 사무실을 운영할 때는 성실하다’, ‘인간적이다는 평판으로도 사무실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지만 전주에서는 그 외에도 갖춰야 할 부수적 요소들이 많다. 그중 하나가 홍보다. 홍보를 하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우리 사무실은 사람을 통해서 구전으로 홍보하고 싶지 블로그나 SNS를 통한 홍보를 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무엇보다 제 색깔을 찾는 게 중요하죠.” 홍보의 특성상 온갖 미사여구가 있기 마련이다. 겉치레 없는 그의 성격으로 미뤄보아 어쩌면 그런 부분이 불편할 수도 있겠다 싶다.

 

 

함께 한다는 것

그가 민주사회를위한 변호사 모임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08년에 김형근 교사의 보안법위반 관련하여 민변에서 사건 수임을 하면서다. 당시 민변 소속 선배가 만 페이지 넘는 사건자료들을 같이 검토해보자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덥석 잡았다. 민변은 인권, 시국사건의 변론을 주로 맡아 온 변호사들이 참여해 결성한 단체로, 전북 민변도 사회적 이슈나 주요 현안 관련해서 목소리를 내고 있다. 때론 우리 단체 사무실로 찾아오는 민원인들의 법률 자문 역할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그가 민변 전북지부 회장으로 있을 당시, 집단 암 발병이 일었던 익산 장점마을 주민들이 전라북도와 익산시를 상대로 주민소송을 제기했다. 그때 민변에서 대리 소송을 했고, 전주종합경기장 이전 관련 롯데쇼핑과 맺은 협약서 해제 여부에 관해서도 민변에서 법률 검토를 한 바 있다.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의뢰받을 때, 민변 구성원 간의 의견은 어떻게 조율하나요? “제가 회장이었을 때 전북민변 내부에 공익위원회를 만들었어요. 그곳에서 의뢰받은 사건을 공익사건으로 맡아서 할지를 조율하죠. 공익위원회를 처음 만들 때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전북민변 독자적으로 성명도 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려고 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더라고요.”

 

 

서울 민변의 경우 서울지역의 특성상 민변 소속 회원이 많고, 다양한 이슈에 대응하는 집행부를 따로 꾸려서 운영하고 있다. 집행부를 중심으로 각종 위원회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으니 현안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역은 집행부도 각자의 본업이 있다 보니 위원회활동이 쉽지 않다. 민변 전북지부의 속사정을 듣자니, 괜스레 미안하다. 우리 사무실로 걸려 온 민원인들의 전화를 너무 떠넘겼다 싶다.

 

 

내가 가진 색

힘드시죠? (웃음)

그가 힘들어 보인다. 나에게 그의 관한 정보가 많이 없던 터라, 인터뷰 전에 그에게 본인에 관한 키워드를 요청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금방 감을 잡으셨겠지만, 그의 성향상 자신을 남에게 정리해서 보이지는 않는다. 키워드 없는 우리의 인터뷰는 말 그대로 수다였다. 평소 말수가 적은 두 사람이 만나서 두 시간 가까이 수다를 떤다는 건, 언빌리버블!

 

 

소식지 지면을 위해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준 그에게 감사하며,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변호사 외에 하고 싶은 게 있나요? “붓글씨를 꾸준히 하고 싶어요. 5년 정도 쓴 거 같아요. 그리고 제가 마음대로 제시간을 쓸 수 있다면 고전 공부도 하고 싶고요. 전주에 고전번역원이 있더라고요. 그곳에서 특강도 듣고 싶어요.” 의외다. 아니 그 다운 취미라고 해야 하나. 이제 오십 초입, 오십의 나이라고 하지만 UN연련분류기준에 보면 그의 나이는 청년의 나이다. 청년의 나이에 붓글씨와 고전이라.

 

 

켈리그라피가 아니고 붓글씨요? 붓글씨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나요? “우연히 붓글씨를 써 본 적이 있어요. 저한테 잘 맞는 취미활동이더라고요. 한번 쓰면 2시간은 훌쩍 지나더라고요. 그런데 자꾸 출품하라니까 그게 고민이에요. 내가 붓글씨 쓰고 만족하면 되지 남한테 보여준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또 당선되면 뭐하겠어요.”(웃음)

 

 

그와 대화를 나누며 난 여러 번 생각을 멈추었다. 그가 6년째 찾고 있는 자신만의 색이 내 눈엔 너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소박하고 익숙하며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그의 법률사무소엔 그의 색깔이 오롯이 묻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