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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기억하는 자들을 위하여

| 이 선 회원

 

 

- <왕십리 김종분><태일이>를 보고

 

한동안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이 커가는 중이어서 그렇다. 몇 년 동안 아예 극장에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이들 보는 영화를 따라간 것이 전부이니 내가 영화를 보러 가지 않은 건 맞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갑자기 혼자 <82년생 김지영>을 봤던 기억이 난다. 방금 글을 쓰다 떠오른 기억이다. 아이들이랑 남편을 다른 상영관에 집어넣고 같은 시간에 상영되는 이 영화를 봤었구나. 기억은 이렇게 제대로 회상하지 않으면 제멋대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녀석이다.

 

 

오늘은 과거의 기억들을 제대로 회상하게 만드는 <왕십리 김종분><태일이>라는 두 편의 영화 이야기를 해보겠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십리 김종분>은 왕십리에서 50년 넘게 노점을 해 온 김종분 여사의 이야기이다. 노점상 할머니의 이야기라니 불쌍한 할머니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김종분 여사는 왕십리에서 오랫동안 함께 장사하던 친구들과 함께 오늘도 행복하게 장사를 하고 계신다.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는 일상의 에피소드 안에 김종분 여사의 과거가 함께 소개된다. 김종분 여사는 19915월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대한극장 앞에서 죽임을 당한 고() 김귀정 열사의 어머니이다. 이 영화는 김귀정 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성균관대 친구들이 뜻을 모아 김귀정 열사 30주년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나에게는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그 시절 죽었던 친구들이 있다. 끄집어내면 아프기 때문에 제대로 기억하기 힘든 기억들, 이 영화는 죽었던 친구들을 제대로 기억하는 법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 하나는 애니메이션 영화인 <태일이>이다. 솔직히 나는 이 영화가 전태일 열사를 다룬 영화인지 모르고 극장에 갔다. “얘들아, 엄마 아빠를 위해서 애니메이션 영화 한 편 같이 봐줄 수 있어?”라고 남편이 아이들에게 부탁했을 때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러 가면서 뭐 저렇게까지 말하는지 좀 의아해하기는 했다. 영화 팜플렛을 보고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련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는 많이들 아실 것이고 다들 보실 수 있는 지금 개봉 중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만 쓰자면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전태일 열사를 인간적으로 너무 잘 이해하게 되었다.

 

전태일 열사의 이야기를 역사적 영웅으로서 웅장하고 엄중하게 다루는 대신 가볍지는 않지만 우리 삶에 아주 친근한 방식으로 다루었기에,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태일이의 이야기이다. 아직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사족을 하나 붙이자면, 영화가 끝났다고 곧바로 상영관을 나서지 말고 엔딩크레딧까지 꼭 챙겨보시기를 권한다. 까만 배경 위로 끝없이 올라오는 사람들의 이름을 보다 보면 나처럼 바로 이 부분이 <태일이>의 가장 감동적인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기억은 그리스 말로 므네모시네(Mnemosyne)이다. 이 므네모시네 여신의 9명의 딸들이 바로 학문과 예술을 가능하게 하는 뮤즈들, 그리스 말로는 무사(Mousa) 여신들이다. 우리가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시도, 예술도, 문화도, 역사도 가능하지 않다. 그래서 기억하는 자들이 사람들의 이야기인 역사를 만드는 자들이다. 기억하는 자들이 없으면 일어났던 사건과 사실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억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일어났던 사건들을 살피고 그 의미를 세우는 일이다.

 

어수선하기 그지없는 특별한 환절기를 맞아 우연히 보게 된 두 영화는 기억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 주었다. 죽은 친구를 기억하는 친구들, 그 친구들의 기억과 그리움, 추모의 마음을 곱게 모아 아름다운 작품으로 탄생시킨 영화감독과 제작진들, 이들이 있어서 이번 겨울은 오히려 참으로 정겹다. 그리고 우리의 전태일 열사, 그 아름다운 사람을 50년이 훌쩍 넘어버린 대한민국에 다시 기억하게 만들어 준 수많은 사람들, 이들이 있어서 올 겨울은 너무 아름답다. 2021년 연말은 어수선하지만 따스하고 아름다운 겨울로 기억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