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체가 창립한지 20주년이 되었다. 단체의 성장기를 함께 지내왔고 앞으로 다가올 청년기는 물론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단체 나이로 50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분이 아닐까 하는 기대를 안고 심훈 회원을 만났다.
먼저, 황금돼지해를 맞아 바라는 새해 소망이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2018년이 가기 전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갈 수 있게 되어서 너무 좋았어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제대로 된 여행을 한 번도 못 갔습니다. 그래서 늘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는데 시작 테이프를 잘 끊었으니 2019년에는 더 많이 여행을 다니면서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많이 가지고 싶습니다.
그리고 큰 딸이 부산으로 학교를 가게 되었거든요.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데 잘 지내줬으면 좋겠고, 아빠가 응원을 많이 해줘야 되니 올해는 준비해야 될 것이 참 많습니다.
창립멤버시잖아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나요?
그러니까요, 벌써 20년이나 되었습니다. 기청 활동을 했던 선배들이 함께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단체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기독운동을 함께 했던 선후배들이 사회에 진출하면서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우리들이 해결해 나가고 도모해야 하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가운데 농민, 노동자, 통일 문제 등이 사회적 이슈로 계속 터져 나왔기 때문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들이 몰랐던 것들을 학습을 통해 알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민운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객사 뒤에서 작은아버지와 노점상을 하는 노동자였습니다. 그 당시 작은아버지께서 기독청년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기청 활동을 하는 선후배들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기독교인이기도 했지만 기독청년들이 무조건 참고 기도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해 약자와 민중들을 위해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기획사를 하기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말씀드렸듯이 노점상을 하다가 노점상이 점점 어려워지면서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에 택시운전을 잠깐 했습니다. 하루 종일 일해 사납금을 채우고 사납금을 채우지 못하면 월급에서 제외되고 그런 식으로 장시간 노동에 저임금을 받는 고된 생활이었습니다. 결국 너무 힘들어서 그만뒀지만 지금 택시운전을 하시는 분들 보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그 뒤에는 대형 화물차 운전도 2년 정도 했습니다.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 보려고 참 노력을 많이 했는데 몇 번 실패하면서 정리를 하게 됐고 전주로 돌아왔죠.
전주에 와서 민미협 회장님 소개로 광고기획사에 취직을 했는데 IMF가 터졌고 월급 받기가 힘들 정도로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회사를 그만두고 제가 직접 차리게 되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서 임대아파트 베란다에서 시작을 했는데요, 주변의 도움을 많이 받아 4평정도 되는 가게를 얻어 조금씩 넓혀갔습니다.
디자인 공부는 광고기획사를 다니면서 틈틈이 하신 건가요?
사실 한 번도 디자인 공부를 제대로 해본 경험이 없었습니다. 직장을 다니면서 현수막 제작하는 과정을 보면서 익혔다가 제 나름대로 현수막을 제작해서 동료에게 보여주고 부족한 부분은 바꾸고 채워나가면서 경험과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려는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또 정말 열심히 뛰어다니면서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개념을 떠나 모두가 “함께”라는 의식을 가지고 일을 했기 저에게 일을 시킨다기보다 모두가 “같이” 하는 느낌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경쟁이 더 심해졌을 텐데 20년을 이끌어온 비결이 뭔가요?
처음 시작했을 때 현수막 가격이 4~5만원이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4~5만원이에요. 그리고 경쟁업체는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광고기획사는 현수막 제작, 간판, 아파트 시설물 광고 등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면 몸도 힘들고 또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에 잘 될 때도 있지만 새로운 것을 하다보면 시간이 오래 걸릴 때가 있어요. 약속시간에 맞추는 어려움도 있고 해서 욕심내지 않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현수막 제작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일을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들려주신다면?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에서 시민재판을 받을 때가 있었는데 현지 재판장에서 사용할 현수막을 직접 만들어서 그분들을 응원했던 기억하고요, 세월호 아이들을 위한 개인 현수막을 전북 각지에서 신청을 받아 1,000장 2,000장을 만들어 거리에 다는 일에 함께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
제가 만든 현수막을 통해 사회적 문제와 약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고 시민들의 참여를 통해 정권을 바꿔내는 일에도 작은 역할이나마 참여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낍니다.
사모님과 함께 일하고 계시는데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기청 활동을 하다가 직장선교위원회라는 모임에서 아내를 만났습니다. 제가 군대 가기 전 아내는 직장선교위원회 새내기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군대 가기 직전이라 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아내는 저를 그때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군대에 있는 동안 아내는 계속 직장선교위원회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제대하고 오랜만에 직장선교위원회 나갔거든요. 교회 뒷문을 열고 긴 생머리 소녀가 들어오는데 “광채”가 느껴지고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까? (웃음)
두 분이 함께 일하시면 아이들과는 어떻게 시간을?
저도 바쁜데 아이들은 얼마나 바쁘겠어요. 사실 아이들은 엄마가 옆에서 아주 잘해줘서 아이들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서 잘 크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늘 잘했다, 고맙다, 하는 표현을 통해 아이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지막으로 스무 살, 청년 참여자치연대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가요?
저는 아주 적극적인 시민단체도 알고 있고 보수적인 단체도 알고 있는데, 참여자전북시민연대는 전체적으로 볼 때 중간자적인 위치에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들어요. 물론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진보적 깃발을 들고 앞장설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중간자적으로 바라보면서 전체적인 것들에 대해 평행을 이루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단체가 여러 시민들과 함께하다 보면 여러 의견들을 같은 방향으로 이끌어 내기 위해 중간자적인 위치에 설 때도 있고 앞장서서 할 때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를 받지 않고 오롯이 시민들의 후원금으로만 20년 동안 이끌어 왔잖아요. 어떠한 권력에도 휘둘리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날카롭게 비판할 수 있는, 이러한 힘들이 꺾이지 않기를 바라죠. 어느 순간 사람이 바뀌면 단체가 바뀌고 방향이 바뀔 수 있는데 참여자치연대는 이러한 것들을 잘 지켜내는 단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터뷰 중간 중간 “함께” 라는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하였다. 자기만 바라보고 자기만 행복하면 되는 세상이 아니라 2019년은 모두가 “함께” 행복했으면 좋겠다.
인터뷰·정리 | 김희진 (회원사업국)
'회원글모음 > › 회원기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교단일기] 채비 (회원통신 2019.02월) (0) | 2019.05.07 |
---|---|
[책속으로] 마음가면 (회원통신 2019.02월) (0) | 2019.05.07 |
[마음시] 직면 - 김이듬 (2019.01월) (0) | 2019.05.07 |
[회원의 글] 미국에 대한 생각 (2019.01월) (0) | 2019.05.07 |
[책속으로] 평균의 종말 (토드로즈/정미나 역) (회원통신 2019.01월) (0) | 2019.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