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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글]Turn off TV, Turn on Life

글 | 박진이 회원


“어? 여보! 이거 왜 이러지?”

소파에서 엉덩이를 막 떼는 참인지, 붙이려는 참인지 모를 자세로 리모컨을 손에 든 남편이 내게 물었다. 청소기의 소음을 피해 안방에서 휴대폰 게임을 하다 청소가 끝나자마자 거실로 나온 남편은 이제부터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서 야구중계를 볼 셈이었다. 아침을 거른 토요일 오전, 이른 점심준비를 위해 냉장고 안의 식재료를 꺼내다말고 나는 TV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옴마, 이게 왜 이런대?”

혼자만 청소에 빨래에 식사준비까지 하는 통에 약이 바짝 올라 말대꾸도 하기 싫었는데 나도 모르게 그만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TV가 고장나버린 것이다. 리모컨을 든 남편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보는데 영상은 검붉게 뭉개져있고 소리만 멀쩡히 흘러나왔다. 남편 손에 있던 리모컨을 빼앗다시피 낚아채서 전원을 껐다 켜보고, 연결된 셋톱박스도 껐다가 켜보면서 혹시나 요것이 멀쩡해지지 않을까 기대를 살짝 해봤으나 역시나. 일주일 드라마 편성표를 줄줄 꿰면서 드라마 보는 낙으로 저녁 시간을 보내는 나에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우리 애들 말로 TV는 나의 완소템이었으니까! 네모 번듯한 TV는 빛을 잃었고 나는 아연실색했다.


사실 고장의 조짐은 벌써부터 있었다. 패널 하단에 가로줄이 생긴 지는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자막이 지나가는 자리에 생긴 실금 하나 정도는 TV를 시청하는데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그러더니 한순간에 훅 문제가 터져버린 거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더니, 가래로도 못 막을 사태가 아닌가 싶은 생각에 힘이 쑥 빠진다. 이제 퇴근 후에 꼬박꼬박 밥 먹듯이 챙겨보던 드라마는 어쩐담. 일요일 오후, 빨래를 개고 다림질 할 때마다 내 무료함을 달래주던 예능프로그램은? IPTV로 즐기던 철지난 영화들은? 아직 넘치게 남아있는 TV포인트는 어쩌라고!

 

며칠이 지났다. 퇴근해서 돌아왔을 때, 반갑게 맞아주는 건 키우는 개 한 마리가 전부. 남편과 아이는 늘 나보다 귀가가 늦다. 집안에는 나와 개 한 마리가 돌아다니는 소리가 소음의 전부다. 대충 라임이(검정색 푸들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하지만 딸애가 지은 이름이라 어쩔 수 없다.)의 먹을 것을 챙겨주고 나도 저녁을 먹는다. 바구니의 빨랫감을 털어 넣고 세탁기도 돌린다. 앞 베란다 불을 훤히 밝히고 화분도 손질한다. 유월 더위와 장마가 몰려오기 전에 제라늄의 웃자란 가지들을 숭덩숭덩 쳐낸다. 잘라낸 가지들은 삽목이나 물꽂이를 해둔다. 그래도 심심하다. 다음 책모임에서 다루기로 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2권을 펼친다. 몇 장 넘기지 못했는데 눈이 뻑뻑하니 아프고 따갑다. 글자들도 아지랑이처럼 번져난다. 시계침은 10시를 향해간다. 곧 드라마 할 시간인데…….


TV 없이 보름을 넘긴다. 물론 요즘 즐겨보던 드라마 ‘녹두꽃’은 모바일TV로 본다. 노안이 시작된 나에게 스마트폰 화면은 너무나 고달프다. 그래서 시청목록을 말도 안 되게 확 줄였다. 전에는 심심하면 TV를 켜는 게 일상이어서 채널을 돌리며 릴레이 시청을 했다. 그러다보니 수시로 해야 할 일이 뒤로 밀렸다. 특히나 만성적인 수면부족과 함께 읽어야 할 책들이 차곡차곡 사방에 쌓이는 게 가장 큰 짐이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TV가 고장 난 덕에, ‘Turn off TV, Turn on Life’를 실천 중이다. 나는 뜻하지 않게, 강제로, ‘TV 없이 살기’ 중이지만 내 주변에는 TV 없이 사는 사람이 꽤 많다. 있지만 잘 보지 않는 사람도 많다. 그들에게 TV는 효용가치가 없어서라기보다 더 좋은 무언가를 위해서 과감히 버린 카드다. 그들의 선택과 달리 강제로 시작한 나는 보름간 참 많이 시달렸다. 습관은 그리 호락호락 바뀌지 않아서 밤마다 10시 드라마 시작할 시간이 되면 모바일로 볼까말까 갈등했다. 책을 읽다가도 거실 벽면을 덩그마니 차지하고 있는 TV에 눈길이 쏠렸다. 라디오를 틀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출퇴근 때 듣는 ‘김차동 FM모닝쇼’와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제외하곤 귀에 잘 담기지 않았다.

 

그냥 TV를 고쳐볼 생각은 안했냐고 물으신다면 부끄럽지만 이미 출장수리를 불렀었다고 고백해야겠다. 패널 교체비용이 자그마치 70만원이라고 해서 새로 사는 게 낫겠다며 일단은 수리를 포기했다. 사람들은 꽤 합리적인 경제행동을 한다. 나도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여러 날, 여러 가지 생각을 저울질해 보았다. 우리 집에서 TV를 아쉬워하는 이는 나밖에 없기 때문에 나만 포기하면 간단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안사고 버티는 중이다. 이 기회에 나도 라이프스타일을 바꿔볼까 해서! 그리고 생각보다 견딜 만하다.


TV에 매이지 않아서 가장 좋은 건 시간이 많아졌다는 거다. 본래 있었던 시간이건만 이제야 내 앞에 뚝 떨어진 시간과 마주하고 있다. 매일 저녁 화분을 손질하고 꼬박꼬박 책을 읽고, 가끔 저녁 산책도 한다. 심심해서 밑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심심해서 여기저기 전화도 넣어 안부를 묻는다. 그리고 수면시간도 늘었다. 


물론 하루아침에 모든 걸 바꿀 수는 없다. 새로 시작한다고 하는 ‘아스달연대기’를 모바일로 볼까말까 여전히 갈등 중이고, 여전히 다림질하는 내내 심심하다. 그래도 도스토예프스키의 책은 3권을 다 봐서 이번 모임은 가벼운 기분으로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아 즐겁다. 딸은 엄마의 완소템 하나가 사라져서 어떡하느냐고 놀리지만, 뭐 어쩌겠어. 새로 발굴하면 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