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이선 회원
매년 5월은 찝찝합니다. 망월동 묘역이라도 다녀오지 않으면 빚을 못 갚은 사람처럼 찝찝합니다. 예전엔 이런 마음의 불편함으로 5월을 견디느니 그냥 다녀오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닳고 달아서 그런 불편함도 더 이상 느끼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들에게 이한열 열사의 묘를 보여주려고 망월동에 들렀다는 것이 더 솔직한 마음입니다. 안중근 의사를 좋아하고 윤봉길 의사의 시계 이야기를 좋아하는 제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은 이한열 열사를 일제 독립운동가와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영화 <1987>의 유튜브 짤만을 보았는데도 질문이 쏟아집니다. 일본 순사에게 유관순 열사가 고문 받고 죽는 것은 이해되는데 대한민국 경찰이 박종철 열사를 죽인 것은 아무래도 이상한 모양입니다. 이래저래 들른 망월동입니다. 그냥 들렀다는 게 더 좋은 표현이겠네요.
그냥 그렇게 망월동을 들렀습니다. 민주 묘역에 들어서는데 노랫소리가 들리더군요. 노랫소리, 주차장 근처에는 누군가의 추모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의 추모제, 5월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분신했었지요. 누구야? 누구의 추모제야? 노랫소리를 따라 갔다가 남편과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듯이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철수 열사의 28주년 추모식, 우리들이 고등학교 시절 참교육을 외치며 분신했던 우리 또래의 열사입니다.
그냥 말이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 28년 전, 나는 죽어가는 김철수 열사를 만나기 위해 전남대 병원으로 갔었습니다. 병실에는 들어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근데 이 기억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철수의 눈빛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붕대를 칭칭 감고 있던 철수의 눈빛. 아무튼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픽션인지, 철수를 그렇게 보내고 다시는 뒤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학생회가 어그러지고 대학 운동에 실망하고 나는 독일로 떠났습니다. 그냥 그랬습니다. 삶이란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니까. 그리고 삶은 내 거니까 그냥 나의 삶을 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철수를 28년 만에 만나고 놀랐습니다. 내 삶이 그냥 나 혼자만의 힘으로 살아온 것만은 아니라는 것, 철수가 항상 내 곁에 있어줬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 미안하고 아프고 고마웠습니다. 입시교육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 아이들은 여전히 학교에 갇혀서 시달리고 있는데, 나는 자식들을 그런 학교에 보내는 학부형이 되어버렸습니다. 철수는 죽는 순간까지 너희들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28년 동안 우리의 학교는 변한 게 없잖아요.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내 가슴 속에 항상 있었던 너를 단 한 번도 찾지 않았다는 게 많이 아팠습니다. 나는 사람들이 죽는 게 싫었습니다. 감히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게 민주화를 위해서건, 통일을 위해서건, 참교육을 위해서건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삶에 대척되는 나쁜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8년 만에 철수를 다시 만나던 순간, 나는 철수가 내 가슴 속에 항상 살아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철수는 죽지 않았던 것입니다. 철수가 죽었다고 생각한 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었지 철수는 늘 우리 곁에, 내 가슴 속에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 추모제 내내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뛰노는 아이들. 너의 죽음으로 내가 이렇게 살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내 능력으로 살아 온 것이 아니라 너의 죽음으로, 너의 희생으로 여기까지 왔다는 것. 사는 사람들은 참 염치도 없지요. 죽은 사람들 덕에 살고 있는데. 정말 몰랐습니다. 진짜 말뿐인 줄 알았습니다, 죽은 사람 덕에 산다는 말.
추모제가 끝나고 철수의 묘소 앞에 헌화를 하는 사람들을 멀찌감치 바라보고 있는데 어머니 한 분이 일행을 벗어나더니 몇 칸 옆의 비석을 손으로 한 번 쓸며 한마디 하십니다. “승희야, 엄마 갈게!” 눈물이 왈칵 솟았습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 곁을 떠난 그들의 남겨진 가족들이 특별한 인연이 되어버린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대어가며 지내온 세월도 보았습니다.
올 해 5월 저는 제 마음 속의 열사를 찾았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마음속에 열사를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떨어져 죽은 선배가 있고 교정에서 분신한 친구들이 있고 바위에서 떨어져 죽은 대통령이 있습니다. 우리 시대가 어두운 시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런 깨어있는 사람들이 우리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 마음속의 열사와 만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주어진 축복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철수야,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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