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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지역재생과 개발사업의 민낯 (김영기대표)

글 | 김영기 대표


 

지난해부터 올초 사이 손혜원 의원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목포 도시재생사업으로 선정이 된 목포 서산, 온금 지역의 근대역사문화공간의 부동산 투자 문제에 대한 여러 견해로 시끄러웠던 것이다. 이 사안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온 것은 우리는 한옥마을과 객리단 길, 서학동 일원에서 이러한 논란을 이미 경험하거나 현재 진행형인 일이기 때문이었다. 


도시 재생 사업은 꼭 필요한 사업이다. 하지만 시작 단계부터 공공의 준비 부족이나 방법을 잘못하면 사업 이익이 특정인에 편중되며 장기적으로 재생 사업이 지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재생 사업의 주체가 공공부문이나 지역 주민인지 아니면 사적 영역이나 외부자본인지에 따라 판이하게 다른 결과로 귀결된다. ‘공공영역과 지역 주민이 주체가 되지 못하고 외부 자본이나 시장권력이 개입된 재생 사업은 결국 누구를 위한 재생 사업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속도가 느리더라도 충분히 계획되고 준비된 도시재생 사업이 필요한 이유이다. 


준비되지 않고 추진된 재개발지역이나 도시 재생 지역은 대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난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기획부동산과 투기자본, 외부 자본이 비교적 빈곤 계층이 많이 사는 정체 지역, 낙후된 구도심 지역에 진입해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개발되고 일부 활성화되면 여기에 지자체나 정부의 투자가 집중되고 빠르게 부동산 가격과 임대료가 상승되면서 정주 여건이 훼손되며 기존의 저소득층 주민을 몰아내는 현상을 이르는 말이다. 1964년 영국 사회학자 루스 글래스가 런던 도심의 황폐한 노동자들의 거주지에 중산층이 이주를 해오면서 지역 전체의 구성과 성격이 변하자 이를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의 견인차는 지역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꾸미며 볼거리를 만드는 미학이다. 그런데 미학을 강화할수록 도심은 관광지가 돼간다. 특히 빈민지역이나 정체되어 있던 지역이 역동성을 갖게 되며 슬럼 거리나 과거의 유산이나 유제가 위험을 탈각한 시각적 쾌락의 대상으로 거듭난다. 봉건제 유물인 한옥이나 산업사회 유물인 슬럼가와 창고와 공장 건물은 가난한 예술가들의 거주지를 거쳐 핫한 공간으로 거듭난다.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도 비슷한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가난하지만 개성 있는 화가, 조각가, 의상과 액세서리 디자이너, 목수, 사진작가, 인디밴드 등이 모여 독특하고 예술적인 공동체 문화를 만들었던 홍익대학교 인근과 망원동, 상수동, 삼청동, 신사동 가로수길, 경복궁 옆 서촌, 경리단 길, 성수동 등 이른바 핫한 공간에서 발견되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만 누릴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카페나 예술 공간 등이 유명해져 유동 인구가 늘어나자 가맹점을 앞세운 기업형 자본이나 외지 자본이 물밀듯이 들어와 상업시설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임대료를 높여 가난한 예술가나 기존 거주자들을 몰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이 ‘공간이 곧 돈’인 공간에서 지역 기반의 공동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국적으로 유사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옥마을도 유사한 경로를 겪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의 공개념, 토지 공공성의 문제다. 도시 재생이나 개발 사업이 곳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결국 중요한 것은 도시 개발이나 재생으로 누가 이익을 얻고 누가 손해를 보는가 하는 문제다. 이것은 도시개발의 정당성에 관한 문제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또한 ‘도시 재생이나 개발로 이룩한 성과가 오래 지속되는가? 아니면 일회성 반짝 특수로 끝나는가?’를 결정하는 주요 변수이기도 하다.


한옥마을의 최대 실수는 한옥마을의 도시재생 사업 이전에 오랜 기간 개발 제한 지역으로 묶여 있어 피해를 겪었던 원주민이나 여기에서 임대로 생활을 하고 있던 세입자들과 일부 예술인들의 지속 가능한 정주여건을 강화하면서 이를 토대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당시 지가가 낮을 때 공공에서 광범위하게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원주민이나 예술인들에게 장기적으로 임대하는 것이었다. 공공의 토지 소유가 많으면 많을수록 원래 추구하고자 했던 가치들을 보존하면서 지속 가능한 공간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박 겉핥기로 진행하며 재생 사업을 추진한 결과 정도 이상의 상업화와 높은 지가, 임대료를 제어하지 못했고 이는 비싼 음식 값과 상품 값으로 귀결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다. 현지인이 떠난 지는 이미 오래고 최근 관광객 증가세가 정체되거나 심지어 감소세를 보이자 비어 가는 공간이 늘고 있다. 새로운 공동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미 전 세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각 지자체들도 이러한 토건업자와 외지 자본 중심의 개발이 도리어 장기적으로 도시를 공동화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개발이익도 대부분 투기 자본과 토건 세력, 일부 기득권층에 집중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근에는 ‘기부 대 양여’ 방식이나 대기업 상업시설 유치를 통한 도시 개발은 더 이상 공공에서 진행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과거 롯데백화점을 비롯한 대형 쇼핑몰 유치 과정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된 일자리 창출이나 이익 공유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음을 이후 진행 과정에서 알 수 있다. 일자리 창출이라면서 파트타임 노동자들과 용역만 양산했고 정규직 본사 직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입점 매장들은 높은 수수료와 본사의 횡포로 신음하고 있다. 울며 겨자 먹기 식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세금도 본사에서 내고 이익금도 본사로 간다. 지역 기부는 단돈 몇 푼도 되지 않는다. 일부 소비자 단체들이 내세운 상생은 ‘눈 가리고 아옹’하는 주장과 다를 바 없고, 전부는 아니지만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대부분 용역비나 챙긴다. 요즈음은 사적인 토지도 대규모 개발을 수반할 때는 여러 방법을 통해 개발이익을 시민과 공유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다양한 안전장치들을 고민하고 있다. 하물며 공공부지는 유지·보전에 더해 매입을 강화하여 토지의 공적 기능이 훼손되지 않고 이후의 공공 개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한 일로 여기고 있다. 공공재를 사기업에 넘기면서 발생한 이득을 통해 일부 배당금을 얻고 사기업의 이익을 무한대로 보장하는 사업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 폭력적인 권력에 의해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소비자 선택권이라는 것도 허울 좋은 궤변이다. 높은 수준의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은 필요하다면 홍콩과 파리라고 마다하지 않듯이, 지역에 살면서도 서울이나 대형 쇼핑몰로 직접 찾아간다. 상위 10%를 위해 공공성을 훼손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상대적 소비 차별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그들은 어차피 자신들만의 새로운 소비 패턴을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하나의 쇼핑센터로 수만 명이 자신의 생업 터전을 잃는 것을 묵과해서는 어떠한 정당성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과거 사례로 충분히 경험했고 이러한 사례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