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박우성 (투명사회국)
이야기를 조금 가볍게 풀어가야겠다. 나는 우리 사회의 정치 분야가 유독 ‘구리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를 우리에게 ‘유머’가 부족한 때문으로 바라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정치인들이 ‘유머’를 발휘하는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보다 우리 사회가 ‘유머’를 용납하는 여유가 없다는 점이 더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상황이 이렇게 된 것이 단순하고 일차적인 원인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닐 게다. 그러나 이 글은 그걸 분석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원인이라기보다는 결과에 가까운 한 가지 설명을 예로 들어보자. 우리는 다른 사람의 평가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다. 이웃을 배려하는 태도야 많이 가질수록 좋은 품성이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의 눈치를 봐야하는 사회문화적 분위기라는 것은 창의력과(얼씨구?) 혁신을(오호라~!) 가로막는 장애물임에 틀림없다. (이게 사실이라면 전임 정권의 창조경제야 애저녁에 싹수가 노랗던 처지였거니와 현재의 화두인 적폐청산마저 난망할 노릇 아니겠는가 말이다.)
각설하고, 지난 달 말 국회에서 ‘패스트트랙’을 두고 벌어진 활극 풍의 블랙코미디가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 167만 명 돌파로 이어진 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 분석 내지는 걱정을 담은 경계의 메시지가 나오고 있는데, 개중 쓸모 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정도였다. 1
하나는 패스트트랙에 대한 여론이 찬성 일색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의견은 물론 51.9%로 긍정적인 평가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부정적인 평가 역시 37.2%로 적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즉 국회 안팎에서 벌이고 있는 저들의 후안무치한 작태에 격분한 국민들이 자유한국당을 해산시켜 달라는 청원에 참여해서 연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중이지만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국민도 3분의 1쯤은 된다는 소리다. 국민청원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이런 여론조사 결과를 황당해 하거나 더욱 비분강개해서 저들을 성토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반감과 적개심을 드러내는 국민청원이 도리어 자유한국당에게 더 많은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는 것마저도 현실이다. 2 3
다른 하나는, 자유한국당 해산 청원이 정치개혁의 동력이 될 수 있기는커녕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의 프레임 싸움을 강화시키는 정치퇴행의 반증일 뿐이라고 평가하는 점에서는 앞의 지적과 마찬가지인데, 이번의 정치개혁안이 실현 가능성에 무게를 둔 정당 간 타협의 결과이며 일종의 차선책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기대감을 만족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나타난 정치 불신의 현상으로서의 결과라는 해석이다. 이것은 단순히 연동형비례제 도입이라는 선거제도의 합리적 개선을 넘어서서 우리의 삶과 미래에 어떤 가슴 뛰는 결과가 담보될 것인가에 대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는 과정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국민들로부터 동력을 얻지 못하니 정치적 거래와 타협을 통해 비례성과 대표성을 훼손하는 결과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고 정치개혁의 기대감이 실망의 예감으로 바뀌는 순간 분노의 대상을 찾아 울분을 토하기 시작한 것이랄까. 4
이러한 분석들은 대체로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이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하고 있다. 그에 더해 이번 일에 대해서 ‘이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는 것이었다’는 안타까움 내지는 한탄을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사실 이런 종류의 진지한 분석이 슬슬 피곤해지고 있는 참이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즉각적이고 솔직한 반응이 더 궁금하고 훨씬 재미있다. 그리고 그러한 장면을 목격하는 것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이 크다.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의 경우도 그렇다. 국민청원 글을 올린 사람이 문느님의 전지전능함을 의심 없이 믿어서 정말로 자유한국당 해산을 추진해줄 것이라고 믿었을까?
청원글의 내용을 보면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격한 감정이 온전히 드러나는 “발목잡기”나 “막말”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대한민국 의원인지 일본의 의원인지 모를 나경원 원내 대표”에 대해 조롱하고 비아냥대는 모습이 있는 그대로 느껴진다. 이 글은 “자유한국당에서 이미 통진당 정당해산을 한 판례가 있기에 반드시 자유한국당을 정당해산 시켜서 나라가 바로설 수 있기를 간곡히 청원합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매우 절실한 느낌을 담았으되 예의와 품위를 갖춘 ‘간곡히’라는 꾸밈말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개똥이나 처먹여라’ 하는 저잣거리의 천박한 욕설과 허세, 바로 그것이다. 5
물론 우리는 시민들이 정치혐오와 불신에 휩싸이고 결국 자신의 삶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정치의 영역에 얼씬대기도 싫어하는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양비론을 경계한다. 하지만 자유한국당 해산 국민청원에 참여한 수십, 수백만의 사람들을 번지수를 잘못 찾은 정치퇴행의 결과로 치부하거나 한쪽 극단의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려는 경향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극복해야 할 문제라는 식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시민들이 발휘하는 집단지성(이라고 쓰고 ‘집체유머플래시몹’이라고 읽자)의 실재를 무시하고 폄훼하게 될 우려가 있다.
나는 이것이 일종의 놀이로 여겨진다. 당장 치밀어 오르는 짜증과 분노를 발산해서 해소하고 이를 통해 활기를 회복하는 시민들의 건강한 생명력이 보인다. 역사나 가치 같은 엄숙한 개념어를 동원해가며 헛된 권위를 세우고 치장하는 정치가 아니라 ‘아니야, 그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아. 그렇게 무겁지도 않아. 우리도 함께 만지고 뒤집어보고 바꿔볼 수 있어’라고 외치며 그들만의 무대로 여겨지던 곳에 난입할 수 있는 배짱과 용기를, 금기에 도전하는 에너지와 생동감을 나는 느낀다.
일베나 극우보수 유튜버들의 미개하고 저질스러운 오염을 염려하는 이들은 온라인을 통한 정치 공론장을 더욱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에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아마도 이들은 공론장에서 저들을 어떻게 몰아낼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이리라. 단언하건데 이러한 쓰레기들을 완전히 깨끗하게 치울 수도 없지만 굳이 그럴 필요도 없다. 시민의 건강한 ‘유머’ 능력 개발과 능동적인 ‘놀이’ 활동을 북돋아주는 한편 시민들의 정치적 의사표시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현실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이어주는 방법을 찾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책이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훈수를 두는 대신(꼰대 극복) 진정성을 갖춘 열린 마음으로(당장 홍보 아이템으로 사용하려들지 말고)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모습을 발견하면 당장 뛰어가 얼싸안고 함께 춤이라도 추어주련만.
-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자유한국당 정당해산 청원’ 참여인원, 5월 2일 정오 기준. [본문으로]
- tbs 의뢰 <리얼미터> 패스트트랙 지정과 관련한 국민인식 조사, (전국 19세 이상, 4.30 실시) [본문으로]
- tbs 의뢰 <리얼미터> 5월 1주차 정당별 지지율 주중집계 결과, 더불어민주당: 1.9%p 상승한 39.9%, 자유한국당: 2.6%p 상승한 34.1%, 정의당: 2.3%p 하락한 5.5%, (전국 19세 이상, 4.29~30 실시) [본문으로]
- 레디앙 [에정칼럼] “패스트트랙이 향하는 곳은 어디인가? - 차선의 정치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김현우, http://redian.org/archive/132811, 2019.05.07. [본문으로]
-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57968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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