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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의 글] 늦은 밤

| 이주희 회원

 

 

 

터덕거리며 집에 돌아온 어느 늦은 밤. 이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었지만 아들 녀석 교복이 생각나 세탁기를 돌렸다. 어두운 집에 불도 켜지 않고 누워 있었다. 고요하지만 마음까지 고요해지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누워있었을까, 눈치껏 돌아가던 세탁기가 멈췄다. 일어나 빨래를 꺼내고 건조대에 넌다. 나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한 방울도 남지 않았다. 빨래들은 어쩔 수 없이 구겨진 채로 건조대에 올라갔다. 남편 옷도 아들 옷도 내 옷도 차례차례. 가족들을 모두 건조대에 올리고 고개를 드니 베란다 창 너머로 보이는 둥근달. 그 달을 본 순간, 달빛에도 빨래는 마르는구나 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그리고 늦은 밤 달빛에도 빨래는 마른다.’ 라는 말을 핸드폰에 적었다. 그러고 나니 구겨진 채로 젖어있던 내 마음으로 무언가 가득 차오른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다.

 

 

3인 아들 녀석이 진로 이야기를 꺼냈다. 농사를 한번 지어보겠다는 거다. 농부가 되어 볼까라는 말을 지나가듯 한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제법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였다. 많은 말들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알았다는 말을 했다. 한마디 말은 작은 폭풍을 일으키며 나를 조금씩 조금씩 흔들었다. 걷잡을 수 없는 생각과 마음들을 모아보려 했지만 허사다.

 

 

어머니가 쓰러지시고 응급실에 오셨다. 평소 건강하고 활기차셨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일은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힘겨운 생사의 갈림길에서 어머니는 우리 곁으로 돌아오셨다. 그리고 조금씩 아주 조금씩 사람들을 알아보고 팔과 다리를 움직이셨고, 지금은 걷기도 연습 중이시다. 나는 어머니에게 살가운 며느리가 아니다. 하지만 내게 어머니는 모든 걸 다 주시는 분이시다. 철마다 밥상 위를 채운 반찬과 냉장고 속 싱싱한 채소들, 갈 때마다 식탁 가득 차려주신 음식 그리고 무엇보다 나란 사람의 부족함을 아셔도 짚어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그저 우리 며느리라고 하시면서 반갑게 맞아주셨고 집에 돌아갈 때는 미리 싸두신 어머니의 마음을 한가득 차에 싣고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시간이 20년이다. 차곡차곡 쌓인 그 시간만큼은 속일 수 없고 사라질 수 없다. 무엇보다 그건 사랑이라는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리라.

 

 

요즘 우리반은 은행에 있는 대기 순번표가 나오는 기계가 필요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천천히 밥을 먹는 나를 찾는 우리반 아이들. 허겁지겁 교실에 가면 민원 폭발이다. 우르르 몰려드는 아이들. 차례차례 말하자 하면 줄을 서는데 보통 긴 줄이 아니다. 교실 안에 갈등이야 늘 있는 것이고 차근차근 대화하다 보면 풀리는 것인데 우리반에서는 술술 해결되질 않는다. 잘못한 건 알지만 사과할 수 없다는 둥, 너만 잘못했다는 둥 하면서 강한 고집을 피우는 녀석들이 제법 있어서 해피엔딩이 쉽지 않다. 매일 반복되는 갈등 상황과 씨름은 계속되고 닳아져 가는 비누 마냥 나는 지쳐간다. 하루를 닫고 돌아가면 오늘 아이들 싸움 해결하다 지나간 것만 같다. 잦은 갈등과 다툼 때문에 수업 시간이 툭툭 끊기는 일도 다반사. 학교가 재미가 없다. 그러니 학교 가기가 싫어진다. 나는 선생인데.

 

 

지친 나는 변해간다. 작은 갈등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인다거나 노력해도 잘 해결되지 않을 때면 먼저 한숨이 터져 나온다거나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이 줄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는 게 맞다. 그럼 멈춰서 잘못된 곳을 찬찬히 봐야 하는데 그럴 마음과 에너지가 없다.

 

 

늦은 밤, 달빛에도 마르는 빨래를 보면서 나에게 있던 일들을 생각하였다. 달빛에 감정은 차분히 가라앉고 자식 일이랄지 갑작스런 어머니의 일이랄지 교실 속에서 지쳐가는 나의 일이랄지 이 모든 것들이 서로 닮은 얼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 생각대로 되지 않고 예상할 수 없는 변곡의 일들. 문제가 없던 때로 되돌릴 수 없고 해결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시간은 흐르고 우린 살아간다. 그러니 내 계획대로 일이 생기지 않았듯이, 내 힘으로만 일이 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가져본다. 달빛에도 빨래가 마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