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자료실/글쓰기대회입상작

[글쓰기대회입상작-고등부] "나와 너는, 너와 나는, 우리는"

"참여하는 시민" 상 | 김가연




‘그래도 나는 하지 않았어.’


언젠가 <프랑스의 문화전쟁-공화국과 이슬람>이라는 책을 읽고,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몇 구절을 인용하여 그 감상문을 쓴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 아랍권 학생들의 히잡 착용을 놓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막을 것인지 그냥 놔둘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한 것을 보고, 나는 햇빛이 뜨거우면 히잡을 쓰면 될 텐데, 라는 시답잖은 농담을 던졌었다. 

 

분쟁의 해결법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햇빛이 쨍쨍이 내리쬐면 히잡이나 양산을 쓰고, 시든 꽃에는 물을 주면 된다. 이렇게 간단한 것처럼, 우리는 친구가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며 받아들이고, 그게 느리면 기다려주면 된다. 이것이 바로 민주 사회, 민주 시민으로서의 첫걸음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현실을 보면 이런 과정은 생략되고, 사람들은 ‘타의’로 인해 일차원적인 시선과 생각에 사로잡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나의 두 친구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한 친구, A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나와 같은 반이었다. 그 아이의 어머니는 일본이었다. 다행히 그 아이의, 어머니의 출신을 가지고 놀리는 일은 없었다. 다만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내가 엄마한테 ‘A 엄마가 일본인이래’라는 말을 꺼냈을 때, 엄마는 나를 꼭 붙잡고 ‘그 아이는 너와 같은 한국인이니까 놀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돼’라는 말씀을 하셨었다. 나는 그 말을, 그렇게 말하는 엄마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A가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어쨌든 내 친구이니 말이다. 


한 번은 A의 집에 놀러갔었다. 그 곳에는 히라가나로 가득한 동화책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일본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지만, 그 때의 나로서는 그 동글동글한 글자가 너무나 신기했다. 그래서 A에게 그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졸랐었다. 그걸 능숙히 읽는 친구를 보고 나는 ‘너 외국어 잘하는구나. 나도 잘하고 싶다.’ 라며 굉장히 부러워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다른 친구, B도 나와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다. 그 친구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들었다. 그리고 그가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때 나는 잘 몰랐지만, 그 아이의 추레한 옷차림과 푸른 멍 자국은 아직도 기억할 만큼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B는 또래 아이들만큼 밝았었다. 가끔 그 친구는 말썽을 부렸고, 누구보다 선생님께 혼나는 일이 잦았지만, 그래도 B는 밝은 아이였다. 


만약 지금 내가 A와 B를 만나면 어떨까. 정확한 것은, 어릴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지금의 사회를 살아가는 나에게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다. 

 

이 사회에서 ‘나와 다른 사람’ 이라는 존재는 뭘까. 

그리고 나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시대다. 또 외국에서 태어난 외국에서 태어난 이들이 우리나라에 와 ‘이방인’이자 ‘한국인’이 되는 세계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인파 사이에 감춰진 ‘나와 다른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방인’은 단지 우리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살았던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을 전제 하에 두고 사용해야 하는 단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와 너는, 너와 나는, 우리는, 과연 어떤 세상을 바라봐야 할까.


사실 나는 앞으로의 세상을 섣불리 꿈꾸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십 년, 백 년, 천 년이 흘러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세상은 오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으며, 바뀔 힘과 가망이 없는 외침을 부르짖음으로써 힘을 함부로 사용하고 싶지도, 헛된 희망을 품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잔잔한 물가에 던지는 돌이 파동을 일으키는 것처럼, 그 의미 없는 외침이 잠시나마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나는 감히 내가 꿈꾸는 세상을 부르짖도록 하겠다. 


내가 생각하고 꿈꾸는 나라는 이렇다. 


A와 B, 그리고 내 친구들과 같은 사람들이 평생 색안경의 프레임에 갇히지 않고 잘 살 수 있도록 만드는 사회와 시스템을 충분히 갖추고, 그 누구도 자신의 태생적인 것 때문에 부당하게 차별받는 일이 없는 세상을, 난 꿈꾸고 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꿈 같은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와 조금 다른 사람이 있다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편견,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는 차별, 당연하다는 듯이 행해지는 남에 대한 무시와 무심함. 


나는 이것을 지켜보고 또는 모방하며 살아왔다. 또 이것이 잘못된 줄조차 몰랐었다. 그동안 날 둘러쌌던 환경은 가을의 곡식처럼 풍요로웠고, 또 단풍 구경을 하는 것처럼 눈에 즐거움을 주었다. 이에 나는 순진했고, 무력했다. 


미디어라는 것은 참 무서운 것 같다. 그 매체 하나로 무언가를 믿게 만들고 아니면 그동안 믿어왔던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 또 거기에서 전하는 말 한 마디가 누군가에게는 다정한 위로가 될 수 있고, 심장을 찌르는 칼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손짓 하나로 자신의 일상은 물론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도 있는 곳에서.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한없이 취약하다. 마치 늑대가 잡아먹으려 속이는 빨간 모자 소녀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늑대가 소녀를 잡아먹게 되면, 우리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모르는, 즉 이용하기 딱 좋은 무지하고 몽매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이는 사람들의 의식을 심고 세뇌하는 가장 빠른 통로가 되고, 어떤 이들은 이것을 통해 편견을 조장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 의심 없이 색안경을 쓰고, ‘자국주의’라는 이상을 내세워 차별과 혐오를 열렬히 신봉하게 된다.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편견과 차별은 혐오와 똑같은 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세상은 수많은 희생과 착오 끝에 피어난 21세기에서, 그토록 인권과 평등을 부르짖었던 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나는 일이 맞는 걸까.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물론 그것도 맞지만, 이보다는 우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봐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일단 다른 피부색과 문화를 갖는 사람들이 ‘다르다’, ‘틀리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려야 한다.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사람은 없다, 라는 말이 괜히 있을까.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들에 대해서 나오는 인터넷에서의 무수하고도 신빙성 없는 정보를 무분별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직접 눈으로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지켜보며, 그들에 대한 편견에서 벗어나 다시 생각을 재정립하고, 그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이런 시간으로 가짐으로써 언젠가는 내가 꿈꾸는 세상, 내 친구 A와 B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고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